진짜 여름 일기장 <남매의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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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항상 밀린 일기와 씨름하곤 했다. 일기장에 쓸 만큼 특별한 날은 며칠뿐. 그 사이엔 적당한 거짓말과 부풀림을 얹은 날들로 겨우 채웠다. 이제 더는 ‘방학’ 없는 어른이 된 나는 반쯤은 날조된 여름 일기로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다 2020년 여름, 진짜 여름 일기장을 찾았다. 너무 사소해서 일기에 적지 않았던, 혹시 누가 볼까 봐 일기장에도 솔직히 적지 못했던 10대의 여름날. 8월 20일(수) 개봉한 영화 <남매의 여름밤>에 그대로 적혀 있었다.  

<남매의 여름밤>2020

남매와 아빠. 세 가족을 태운 하얀 다마스가 여름방학 동안 지내게 될 할아버지 집으로 향한다. “할아버지한테 말한 거 맞지?” 누나 옥주(최정운)은 아빠(양흥주)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마냥 즐거운 동생 동주(박승준)와 달리 할아버지 집으로 ‘놀러’ 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옥주는 이 상황이 마냥 불편하다. 나는 옥주의 꼼지락거리는 손과 창밖을 향하는 시선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던 ‘미련’의 노랫소리가 점점 커져 화면을 뒤덮는다. 

<남매의 여름밤>의 ‘여름’은 여러모로 진짜다. 영화 음악도 밖에서 끼워넣는 대신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게 한다. 때론 자동차의 라디오에서, 때론 거실의 전축에서 나오는 음악이 곧 배경 음악이 된다. 그 사이를 여름의 일상 생활 음이 촘촘하게 채운다. 담을 넘어오며 먹먹하게 바뀌는 동네의 소란스러움, 우렁찬 매미 소리, 거실에서 탈탈거리는 선풍기 소리까지. <남매의 여름밤> 전체가 ‘한국 여름 ASMR’ 같다.  

<남매의 여름밤>2020

윤단비 감독은 ‘여름의 시간’도 채집하듯 담아냈다. 한낯에 집이 뜨거워지는 시간부터 해가 지고 집이 식어가는 시간이 실제 ‘자연광’으로 살아난다. 이른 저녁 까무룩 단잠에 빠진 동주를 “늦었어, 학교 가야지!” 흔들어 깨우는 아빠의 장난도 여름 저녁노을이 물드는 매직 아워 아래에선 깜빡 속아 넘어 갈 법하다. 이렇게 진짜 시간을 영화에 담기 위해 감독은 시나리오 순서대로 영화를 촬영했다.   

남매가 여름을 보내는 2층 양옥집도 세트가 아닌 실제 집을 빌려 촬영했다. 어느 가족이 살면서 남겼을 흔적이 묻어 있는 진짜 집에서, 남매와 아빠, 고모와 할아버지까지 다섯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콩국수, 수박, 비빔국수, 포도를 보면 예능 프로그램이 한껏 ‘꾸몄지만 안 꾸민 듯’ 연출한 여름 방학의 이미지가 얼마나 판타지인지 새삼 실감 난다. 보통 사람들의 진짜 ‘여름 방학 감성’은 이런 거였지. 

<남매의 여름밤>2020

이렇게 ‘필터 없는 여름’ 안에서 누나 옥주의 세계가 흔들린다. ‘가족’이 세상 전부인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 때문에 흔들리고 금이 간다. 아이들은 균열의 틈새로 어른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보게 된다. 자꾸 변명만 하는 아빠, 끝내 용기 내지 못하고 떠난 엄마, 늦은 밤 불쑥 찾아와 소란 피우는 고모부. 그때 놀란 할아버지는 챙기는 것도, 술에 취한 고모를 달래는 것도 아직 어린 옥주의 몫이다. 옥주는 여름의 소동 속에서 ‘가족의 세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집을 빠져나가 맞닥뜨린 ‘더 크고 소란스런 세상’에 놀란 옥주가 경찰서에 멍하게 앉아 있을 때 데리러 온 사람도, 생일에 케이크를 나눠 먹을 사람도 결국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남매의 여름밤>은 이처럼 소소하지만 선명한 기억을 소환해낸다. 집을 잠깐 잊고 실컷 놀다가 늦은 저녁, 길목에서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구급차를 보면서 덜컹거렸던 마음이 기억난다. ‘우리 집이 아니게만 해주세요. 그럼 저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문득 불어난 걱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속으로 빌면서 걸음은 빨라진다. 그렇게 도착한 집, 평소와 다름없는 가족의 모습에 안도했던 기억. 안타깝게도 옥주는 그렇지 못했지만.           

<남매의 여름밤>2020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 세계의 균열을 이해할 수 없는 옥주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윤단비 감독은 이 울음조차도 ‘필터 없이’ 전달할 뿐, 별다른 위로는 없다. 하긴 옥주에게 가장 큰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은 그 깨진 세상에서도 썩 잘 커 준 옥주 자신이겠지. 어른이 된 나는 <남매의 여름밤>의 또 다른 ‘남매’ 아빠와 고모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어른’ 남매도 이 여름이 힘들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밤, 거실 소파에 눈을 감고 앉아, 가수 장현이 부르는 ‘미련’을 크게 틀어 둔 할아버지의 마음은 아직 잘 모르겠다. 추억일까, 회한일까, 또 다른 감정일까. ‘어른의 어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내겐 더 많은 여름밤이 필요하겠지. 

이번 여름방학이 옥주에겐 정말 길었을 테다. 그 시절 여름 방학은 학교라는 ‘또래의 세상’과 단절되어 나만의 이야기를 쌓는 성장의 시간이었다. 개학 날 책상을 쓰다듬으면서 ‘비로소 내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여름 동안 훅 달라져 버린 내가 싫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한 번의 여름으로 훅훅 달라지는 나는 없다. 몇 해 전 여름과 어제의 내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면, <남매의 여름밤>이 잊었던 ‘성장의 여름’을 다시 맛보게 해줄 것이다. 문득 어느 아침, 선풍기 없이도 시원한 바람에 눈을 뜨며 ‘올해 여름도 갔구나’ 아쉬워하기 전에.

editor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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