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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배우 김윤석은 거기 없었다

제목은 모호했고, 줄거리는 밋밋했다. <미성년>(2019)은 서로의 아빠 엄마가 불륜이라는 알게 된 두 소녀와 그 가족의 이야기.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설명은 양날의 검이다. 카메라 앞의 배우 김윤석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지만, 카메라 뒤의 ‘감독 김윤석’은 아직 잘 모른다.

<미성년>2019 ©쇼박스

포스터에는 염정아, 김소진, 김혜준, 박세진까지 여배우 넷과 배우 김윤석이 있다. 이 구도와 조합도 낯설다. 지금껏 포스터 속 김윤석은 살기 등등하거나, 세상 고뇌를 다 짊어진 남자들 중 하나였다. 이처럼 정체가 묘연했던 <미성년>은 시작한 지 불과 몇 분 만에 본색을 드러낸다.

<미성년>2019 ©쇼박스

<미성년>의 오프닝. 한 소녀가 창문에 코를 박고 시끌벅적한 식당 안을 훔쳐본다. 소녀의 시선이 뭔가를 찾다가, 소곤소곤 말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한다. 뒷문 근처에서 중년 남성과 여성이 손을 조물거리며 다정하게 얘기하고 있다. 소녀 얼굴에 낭패스러운 표정이 스친다. 인기척을 느낀 여인이 다가오자 당황한 소녀가 도망친다.

의미 없이 카메라를 휘두르는 순간이 단 하나도 없다. 힘 빼고 쓱쓱 찍은 것 같지만 인물의 성격, 상황, 감정, 관계를 날렵하게 담아내면서 딱 필요한 만큼의 호기심만 남겨둔다. 신선하고 능란한 오프닝이 딱 잘라 말하는 것 같다. 굳이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수식은 거추장스럽다고. 우리가 30년을 봐 온 배우 김윤석은 거기 없다. 5년간 첫 영화를 끈덕지게 준비한, 2019년 한국 영화계가 얻은 매력적인 신인 감독이 있다.

<미성년>2019 ©쇼박스

영화에서 불륜은 당연하게도 파국의 장치로 쓰여왔다. 비윤리적인 당사자들은 비밀을 숨기려 애쓰고, 배신당한 사람들은 응징하려 기를 쓴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긴장감을 얻지만, 인물들은 흩어지고 박살난다. 하지만 <미성년>에서 모순적이게도 불륜을 흩어져있던 인물을 만나게 하는 장치로 쓴다. 대원(김윤석)과 미희(김소진)의 불륜으로 그들의 딸 주리(김혜준)과 윤아(박세진)이 만나고, 대원의 아내 영주(염정아)가 미희를 만난다.

가족의 불륜이라는 원치 않는 인연으로 만난 네 여성 사이에 분노는 있을지언정 응징은 없다. 그들이 착하거나 순응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빼앗고 뺏긴 관계’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두 사람, 아니 네 사람을 기만했어!”라는 영주의 말처럼, 불륜은 기만과 비겁의 결과다. 대원은 모두에게 비겁했고, 미희는 자신에게 비겁했다. 비겁의 책임은 각자가 질 뿐이다. 대원의 기만과 비겁에 가장 크게 상처받은 영주조차, 그 분풀이를 미희에게 하지 않는다.

<미성년>2019 ©쇼박스

병원으로 미희를 만나러 간 영주가 “유부남인 줄 알았느냐”고 묻자 미희는 “해보세요. 그게 맘대로 되나”라고 응수하지만, 미희의 가슴에선 아이를 잃고 불은 젖이 눈물처럼 흐른다. 그녀들의 딸 주리와 윤아도 길지 않은 인생에 불쑥 끼어든 이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애를 쓴다. 그사이 다 팽개치고 도망간 대원은 바닷가 마을 부랑자 여인(이정은)과 어린 양아치들에게 혼쭐이 난다. 이처럼 문제에서 도망치는 남자들이 제자리걸음 하는 사이, 문제를 솔직하게 마주한 소녀와 여인들은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미성년>2019, 염혜란, 정이랑, 이상희, 이희준, 박세진, 정종준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 ©쇼박스
<미성년>2019, 김윤석 감독이 배우 이정은에게서 끄집어 낸 신선한 얼굴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쇼박스

김윤석 감독은 첫 연출작으로 ‘배우 김윤석’의 세상과 ‘감독 김윤석’의 세상을 명확히 구분 지었다. 지금껏 배우 김윤석의 세상에서 여성들은 죽거나, 나쁘거나, 이용당하거나, 사라졌다. 하지만 감독 김윤석의 세상은 ‘살아있는 여성’들의 생기로 가득하다. 마치 ‘배우 김윤석’이 몸담았던 세상에 보란 듯이.

김윤석 감독의 세상에서 배우 염정아와 김소진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신인 김혜준과 박세진은 대범하다. 염혜란, 이정은, 정이랑, 이상희, 김희원, 이희준, 정종준 등 모든 얼굴이 등장하는 순간도 리드미컬하다. <미성년>에는 분량과 상관없이 모든 인물이 반드시 존재 이유가 있고, 그 덕분에 모두에게 눈길과 마음이 간다. 연출자 김윤석의 가장 매력적인 내공이다. 특히 배우 이정은에게서 끄집어 낸 신선한 두려움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미성년>2019 ©쇼박스

처음엔 모호했던 제목 <미성년>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여운 긴 깨우침으로 다가온다. 일본의 철학가이자 무도인(武道人) 우치다 타츠루는 책 <곤란한 성숙>에서 “성숙이란 참 곤란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지난 달보다 3% 성숙했다”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이상하다. 성숙에는 지표가 없고, 지나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을 하루하루 담담하게 보내는 사이에 각자의 처지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상처를 주고받으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몸에 익은 경험지, 실천지의 깊이와 두께가 곧 ‘성숙’일 것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성숙에 관한 설명은 김윤석 감독 첫 영화 <미성년>의 어른스러움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미성숙한 세상의 성숙한 감독 김윤석의 영화는 놀랍도록 사랑스럽다. 그의 배우 출연작만큼이나 연출작이 기다려진다. 사실 감독 김윤석의 다음 영화가 더 궁금하다.

에디터 박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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