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bookTwitterInstagramYouTube1boon

빵과 장미 그리고 캡틴 마블

편집장의 편지 #003

“내 수의는 남자 걸로 지어라.” 올해 아흔 살이신 외할머니가 이십 년 전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다음 자식, 손주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날란다. 공부도 원 없이 하고, 세상도 원 없이 다녀보고, 연애도 실컷 하고.” 아무도 “뭐 그런 별난 소릴 하시느냐”고 토 달지 않았어요. 모두 알고 있었던 거죠.

여동생 다섯, 막둥이 남동생 하나 7남매의 맏이였던 외할머니가 열일곱 살에 결혼해 오 남매를 낳아 키우면서 세운 원칙은 “딸이고 아들이고 공부는 똑같이 시킨다”였습니다. 그 원칙은 저희 어머니대로 건너오면서 “딸이고 아들이고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라”로 업그레이드됐고, 전 그 혜택을 받고 자랐습니다. 숱하게 “여자가 무슨?” “여자라서 안 돼” “여자는 못 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마다 “왜?”라고 반박할 수 있었죠.

<캡틴 마블> ©Marvel Studios 2019

<캡틴 마블>을 봤습니다. 그녀가 지구에 떨어진 때가 1995년. 6년 전 지구에서 사라진 캐럴(브리 라슨)은 미 공군 조종사였으니 대략 20대 후반이었을 테고, 저보다 열 살 안팎의 언니인 셈이죠. 영화가 짧은 플래시 백으로 보여준 소녀 캐럴의 ‘분함’에 격하게 공감했습니다. <캡틴 마블>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고백하자면 욘 로그(주드 로)가 무기 버리고 주먹으로 붙자고 했을 때, 캐럴이 응할 줄 알았어요. 저도 현실이 지정한 링 위에서 싸우는 데 익숙했던 겁니다. 하지만 캡틴 마블은 세상이 정해놓은 방식으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줍니다. 현실이 ‘룰’이라고 이름 붙인 권위에 맞서는 것. 바로 ‘게임 체인저’의 자세죠.

<캡틴 마블>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장에 ‘게임 체인저’가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 중 하나입니다. 게임 체인저들은 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건 당연합니다. 과거 권력 게임의 승자(혹은 승자를 꿈꾸던) 집단에 게임 체인저의 등장은 그 자체로 피곤하고 불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든 비즈니스든 세상은 늘 게임 체인저에 의해 변화했습니다. 무시하거나, 폄훼하거나, 공격할 순 있겠지만, 이미 시작된 변화의 흐름을 되돌린 사례는 없어요.

1908년 3월 8일 미국 뉴욕 여성 노동자들이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 한국여성단체연합

2019년 3월 8일, 오늘은 111주년을 맞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1908년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한 손에는 빵을, 한 손에는 장미를 들고 “생존권과 참정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날이죠. 그 뒤 무려 111년이 지났습니다.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일어나는 중입니다. 몇 년 전에야 미투 운동이 촉발됐고, 몇 편의 여성 히어로 영화가 나왔을 뿐이에요. 더 큰, 더 벼락같은 변화들이 나타날 겁니다. 저는 그 변화들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외할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외할머니가 ‘남녀 평등 교육’ 원칙을 세워주신 덕분에 저는 그녀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 다음 생에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때쯤엔 “여자라서 못 해, 안 돼”라는 어처구니없는 룰도 사라졌을 테니, 더 신나게 여자로 살아보려고요. 안타깝게도 덜 바뀌어 있다면, 또 제 다음 세대를 위해 목소리를 내면 되니까요.

미세 먼지도 좀 걷혀 외출하기 좋은 날씨입니다.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극장에서 <캡틴 마블> <칠곡 가시나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더 와이프> <가버나움>을 챙겨 보셔도 좋겠네요.

2019년 3월 8일

박혜은 편집장 드림

Post a Comment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