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마, 기억해 <소년시절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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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소문은 들었다. 중국 영화 <소년시절의 너>는 말랑한 제목에 홀려 극장에 갔다가 정수리를 세 번쯤 후려맞고 인생 영화 리스트에 올리는 영화라고. 마침 8월 14일(금) VOD 서비스를 시작했다. 폭염이 시작된 늦여름, 코로나를 피해 늦은 여름 휴가, 마음에도 달달한 당 충전이 필요하다. 얼음 컵에 콜라를 가득 채우고 <소년시절의 너>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제아무리 세다고 한들, 청춘 로맨스겠지. 결론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프닝 자막이 생경하다. “학교 폭력은 바로 여러분 곁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곧이어 ‘공익광고 협의회’ 로고가 나올 것 같다. 아직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몇몇 장면이 흘러간 뒤, 영화는 2011년 대입 시험을 60일 앞둔 우등생 첸니엔(주동우)의 일상을 비춘다. 

<소년시절의 너>2020

마치 죄수들을 감시하기 위해 설계한 ‘판옵티콘’을 재현한 듯한 입시 명문 고등학교. 학생들은 “입시 필승”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뛰고, 산처럼 쌓인 참고서 벽 아래 머리를 박고, 쫓기듯 영어 문장을 외운다. 그리 낯설지 않은 입시 풍경이다. 어느 날, 학교 중앙 마당으로 한 여학생이 투신한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댄다. 슬프지만 이조차 익숙하다. 첸니엔은 투신한 소녀에게 겉옷을 덮어줬다가 학교 폭력의 새로운 먹잇감이 된다. 소년적시(少年的你). 130분 러닝타임 영화에서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까지 7분 남짓 동안, <소년시절의 너>의 증국상 감독은 ‘이 영화는 당신의 예측을 한껏 빗나갈 겁니다’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청춘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아니, 청춘 로맨스 영화다. 그 청춘이 우리의 기억처럼 말갛게 푸르지 않고, 그 로맨스가 우리의 추억처럼 뽀얗게 아름답지 않을 뿐이지. <소년시절의 너>는 ‘지옥에 사는 소녀’ 첸니엔(주동우)가 ‘바닥에 사는 소년’ 샤오 베이(이양천새)을 만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옥을 지나 바닥을 딛고, 어른이 되는 로맨스다. 

<소년시절의 너>2020

두 사람은 일찍부터 스스로 지키며 산다. 첸니엔의 엄마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느라 바쁘고, 샤오 베이의 엄마는 어린 아들을 짐짝처럼 내팽개치고 떠났다. 입시 지옥이 키운 어린 괴물들은 귀신같이 무리 밖 외톨이 첸니엔을 찾아내 물어뜯는다. 어느 밤, 첸니엔은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는 샤오 베이를 보고 끼어들었다가 함께 얻어맞는다. 먹이사슬 가장 밑단의 두 아이는 금세 서로가 동족이라는 걸 깨닫는다. 웃음을 처음 배운 아기처럼 함께 웃고, 작은 두 어깨를 덧대고 파들파들 떨면서 함께 운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외유내강 소녀와 외강내유 소년이 서로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는 부나비 같은 첫사랑은 ‘수도 없이 본 청춘 로맨스’ 그대로지만, <소년시절의 너>는 시작부터 기세가 다르다. 일단 증국상 감독의 연출. 영화를 보다가 10분에 한번씩 감탄과 질투가 섞인 탄성이 절로 난다. ‘한국 영화,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함께.

증국상 감독은 풍경부터 인물까지 모든 장면에 정확하게 이야기를 담을 줄 아는 데다, 지옥의 살풍경마저 벽에 붙여 감상하고 싶게 만드는 미감도 탁월하다. 사회파 드라마처럼 문을 열고, 청춘 로맨스의 공식을 잘 푸는가 싶더니, 긴박한 범죄 스릴러로 과감하게 점프하는 연출도 매끄럽다. 다소 선을 넘는 폭력 묘사가 걸리지만, 경각심의 의도를 충분히 살린다. 중국에선 2019년 여름, 디즈니의 <알라딘>을 밀어내고 3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킨, 대형 흥행작이다. 

<소년시절의 너>2020

그 중심을 잡는 건 배우 주동우다. 그는 표정을 드러나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말을 건네는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다. 영화가 뭔가를 설명하기 전에도 그의 얼굴엔 이야기가 찰랑거린다. 웃음이든, 눈물이든, 고통이든, 공포든, 주동우의 얼굴이 격렬해지는 순간들이 <소년시절의 너>의 명장면으로 각인된다. 장이모 감독이 <산사나무 아래>(2010)에서 보석같은 신인 주동우를 발굴한 은인이라면,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7)에 이어 그를 가장 빛나게 세공하는 동지는 증국상 감독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신인 배우 이양천새도 이 영화의 반가운 발견이다. 중국에서 보이 그룹 ‘TFBOYS’ 멤버로 활동하던 그는 이 영화로 홍콩 금상장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신인상 후보에 모두 올라,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영화 시작 부분에 첸니엔 반복하는 ‘was’와 ‘uesd to’의 의미가 보인다. 어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어떤 과거는 단절된다. 우리는 곧 과거가 될 오늘을 살면서 이어갈 것과 매듭지어야 할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좋은 대학만 가면 모든 과거는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빛과 영광”을 맞이할 것이란 어른들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이제는 영화 속 첸니엔도, 영화를 보는 나도 안다. 그러나 영화 안팎에서 여전히 거짓말이 룰이다. 정면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짓는 주인공들은 ‘잘 잊는 것’ 말곤 장점 없는 어른이 되어가는 내게 <소년시절의 너>를 잊지 말라고 한다. 달달한 청춘을 보려다가, 씁쓸한 어른이 된 나를 만났다.

editor 박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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