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축하는 넣어두세요

아델 에넬 인스타그램(@adelehae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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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005

훌륭한 여성들의 성취를 전하는 건, 기운 나는 일입니다. 일본에선 흔치 않은 사회파 영화 <신문기자>(2019)로 한국인 배우 최초로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심은경 배우, 미국 <버라이어티>지가 선정한 2020년 영화계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된 <기생충>(2019)의 조여정, 이정은, 박소담, 장혜진, 정지소 배우,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한 애플 광고에 세계적 아티스트들과 함께 출연한 <기생충> 곽신애 대표 등 존경하는 여성 영화인들의 성취로 2020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운차게 기릴 작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운 차림 버튼’을 가장 강하게 눌러 준 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의 엘로이즈를 연기한 배우 아델 에넬입니다. 올해 45회 세자르 영화제가 로만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을 수여하자, 여우주연상 후보로 참석했던 아델 에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수치스럽다!”

확실히 밝히건대, 로만 폴란스키는 아동성범죄자입니다. 그는 1977년 미국에서 13세 여성 청소년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항소를 포기하고 ‘유죄 인정 조건부 감형 협상(플리 바겐, Plea bargain)’에 실패하자 1978년 유럽으로 도망쳐 프랑스 국적을 얻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이 없거든요. 32년간 도망 다니다 2009년 취리히 영화제에 상을 받으러 간 스위스에서 또 성폭행 혐의로 기소됐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어요. 인터폴은 40년 넘게 로만 폴란스키를 수배 중입니다.

현재까지 로만 폴란스키의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은 12명에 이릅니다. 올해 세자르 영화제 12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폴란스키 영화의 프랑스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J’accuse)>입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채 범죄자로 몰린 드레퓌스 중령과 그의 무죄와 진실을 외친 에밀 졸라의 고발을 영화에 담았다고 합니다. 폴란스키에겐 120여 년 전 권력에 의해 인권이 짓밟힌 역사 속 피해자는 보이고, 현실의 피해자는 보이지 않나봅니다. 그에 맞서 아델 에넬은 침묵 대신 분노로 아동성범죄자를 애틋하게도 예술가로 떠받드는 세자르 영화제를 고발한 겁니다.

세자르 영화제가 로만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을 수여하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아델 에넬과 셀린 시아마 감독이 항의의 표시로 퇴장했다. 아델 에넬은 “브라보! 아동성애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paris match

“예술의 역사는 범죄를 저지른 예술가로 가득 차 있다.” 세자르 영화제에 앞서 지난 76회 베니스영화제도 <나는 고발한다>에 은사자상을 주면서 이렇게 번드르르한 소견을 밝혔습니다. 멋지게 들리네요. 일견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버젓이 현재의 피해자가 존재하는, 죗값을 받기는커녕 도망 다니는 범죄자에게 겨우 예술 따위가 면죄부를 주다니요. 

종종 예술과 범죄를 양팔 저울 위에 올리고 무게를 재려는 시도를 목격합니다. 다분히 위협적이고 오만한 발상입니다. 예술이 범죄에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돈으로 천국행 면죄부를 살 수 있다는 ‘중세시대 면죄부 팔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간절히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그저 파렴치한 사기일 뿐이죠. 양팔 저울 위 범죄의 맞은편엔 적법한 처벌만이 놓여야 합니다. 피해를 묻어두지 않고 고발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이유입니다.

실은 여기까지,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성의 용기를 응원하며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편지를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3월 9일(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관한 국민일보 취재팀의 잠복 취재기를 접했습니다. 이전부터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심층적으로 취재하고 알려 온 미디어 ‘닷 페이스’의 동영상 연재기획도 함께 챙겨봤습니다(두 매체 모두 결코 선정적이지 않게 사건의 핵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직 못 보셨다면 반드시 보시기를 권합니다). 수십만 명의 범죄자가 오늘, 지금도 성폭력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무릎이 탁 꺾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천인공노할 성범죄를 막기 위해 수많은 운동가와 10만 명 넘는 국민의 목소리가 더해져 지난 3월 5일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이라 불리는 국민청원 1호 법안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됐지만, 죄의 무게에 비해 처벌의 범위와 강도가 미흡한 게 사실입니다. 고구마 줄기처럼 성폭력 솜방망이 처벌 사례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지난해에도 세계 여성의 날에 여러분께 편지를 썼습니다만, 올해는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할 순 없겠네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습니다. “기억하세요. 오늘-그리고 매일- 우리 여성이 원하는 것은 축하나 기념식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평등권입니다.”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어떤 처벌도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상쇄할 순 없겠지만, 엄중한 처벌은 우리 사회가 어떠한 종류의 성폭력도 결단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작용할 겁니다. 그러니 축하는 넣어두세요. 올해는 거절합니다.

2020년 3월 10일

박혜은 편집장 드림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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