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 은희, 자영 그리고 김지영과 나

김도영, 김보라, 윤가은, 한가람 - 여성 감독 스페셜 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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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K 토크: 오늘의 여성 영화와 여성 캐릭터 재현

2020 평창국제평화영화제는 최근 한국영화 트랜드를 포착하는 ‘스펙트럼K’ 섹션을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이번 주제는 ‘여성’. 스펙트럼 K 섹션에선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2018),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8),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2019),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2019) 그리고 박강아름 감독의 다큐멘터리 <박강아름 결혼하다>(2019)가 상영됐습니다.

다섯 편의 영화를 이어보면, 한 편의 거대한 연작이 완성됩니다. 제목을 붙이자면 ‘2020년 한국 소녀, 어른이 되다’가 아닐까요.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소녀 시대부터 20대, 30대까지 공감 가득한 삶의 연대기가 펼쳐집니다. 스펙트럼 K 섹션의 마지막 상영작 <82년생 김지영> 상영 후 김도영, 윤가은, 김보라, 한가람 감독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한 시간 가량 이어진 열띤 대담 중에서 중요한 주제를 골라 정리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 제 선택은요?

김도영, 윤가은, 김보라, 한가람 감독의 영화에는 주, 조단역을 막론하고 다양한 여성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숨쉽니다. 감독 자신과 닮은 공감의 인물, 우러러 보고픈 동경의 인물, 영화를 완성하고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 인물 그리고 감독을 위로해 준 인물까지 다양하죠. 그렇다면 다른 감독이 창조한 여성 캐릭터는 어떨까요?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를 선택한다면? 네 감독이 관객 입장에서 선택한 ‘원 픽’ 캐릭터는 누구인지, 또 그 인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최애’ 여성 인물 탄생기가 시작됩니다.

<82년생 김지영> 김도영 감독, 사진 2020 평창국제평화영화제

김도영 감독의 PICK <우리집> 유미, 유진 자매

<우리집>의 꼬맹이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도 그 또래의 아이가 있거든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을 나이인데, 아이들이 편안하게 연기하는 걸 보면서 정말 놀랐습니다.

저는 유미가 정말 좋았어요. 제가 딸 셋 중 장녀인데, 유미 같은 언니는 아니었거든요. 속 깊은 유미에게 존경스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막내 유진은 언니들을 힘들게 하는 캐릭터로 묘사될 수도 있었는데 너무 사랑스러워서 모든 게 용서가 되더라고요. 윤가은 감독님이 아이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 보셨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어떻게 영화를 촬영했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윤가은 감독 COMMENT “유미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촬영했죠”

엄청난 칭찬을 받아서 기분이 좋네요. 영화를 만들면서 유미에게 이입을 많이 했어요. 저도 남동생이 있는 장녀인데, 책임감 때문에 고민을 속으로 삭히는 아이였어요. 제가 어릴 때 동네 언니들과 사귀면서 언니들을 의지하고,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부리면서 정말 좋았거든요. 그런 제 모습을 떠올리면서 유미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실제 유미를 연기한 김시아 배우가 동생만 셋이에요. 가장 어린 동생과 나이차도 많이 나고요. 동생들을 책임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몸과 마음으로 11년을 살아온, 말 그대로 진정한 맏언니이자 누나예요. 그 친구는 속이 너무 깊어서 제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자라면서 만들어진 모습도 있겠지만, 품성 자체가 그래요. 그런 모습에 자극을 받아서 김시아 배우와 함께 유미 캐릭터를 만들어갔습니다.

김도영 감독님이 말씀하신 대로, 유진이는 언니들을 잘 따르면서도 때론 방해가 되기도 하는 ‘선’을 잘 넘나드는 인물이어야 했어요. 그런 연기를 잘 해낼 배우가 흔치 않더라고요. 어떤 연기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는 캐릭터니까요. 배우 찾느라 정말 오랫동안 애를 썼어요. 그러다 정말 ‘갑툭튀’한 주예림 배우를 만나게 됐어요.(웃음) 외동이라서 언니들과 있는 걸 정말 좋아했고, 현장에서도 어른스럽고 참을성도 많았죠. 함께 연기하는 언니들이 잘 이끌어줘서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담을 수 있었어요.

<우리집> 윤가은 감독, 사진 2020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윤가은 감독의 PICK <아워 바디> 자영

꼽고 싶은 인물이 너무 많아서 평창영화제 오는 길에 정리하려고 했는데…(웃음) 저는 <아워 바디>의 자영이 굉장히 사실적이면서도 굉장히 영화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겐 자영의 모든 것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아워 바디>를 보고나서 제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을 비롯해서 정말 많은 생각을 오래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배우와 이런 인물을 만들었을까?’ 자영은 제게 이런 고민을 던져준 인물이었어요. 자영을 보고 한동안 앓듯이 상상하고, 또 생각했어요.

한가람 감독 COMMENT “상당 부분은 제 이야기지만, 또다른 출발은 최희서 배우예요”

바로 옆자리에서 다른 감독님이 제 영화를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해주시는 걸 처음 들어요.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사실 자영은 빨리 만든 캐릭터였어요. 상당 부분 제 이야기를 썼거든요.  저와 제 친구들 이야기. 대사도 제가 평소에 했던 말,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말, 주변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들로 술술술 써 내려가서 일기 같은 느낌이 있죠. 굉장히 빨리 썼습니다.

그렇게 술술 쓰고 나서, 캐스팅할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솔직히 자영은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거든요. 어떤 배우가 가장 좋을까 고민하다가, 배우가 캐스팅되면 그에 맞춰서 자영이 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최희서 배우의 프로필 중에서 웃고 있는 사진을 봤는데 표정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관상을 보는 거냐”고 물으시는데(웃음), 그런 느낌이었어요. 자영의 얼굴이라고 생각했죠.

최희서 배우도 시나리오에 공감하면서 봤다고 했어요. 희서 배우는 자신과 자영을 비교하면서 이해가 가는 부분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촬영을 시작하면서 희서 배우가 “어떤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만들려고 하니까 너무 인위적인 것 같고, 더 힘이 드는 것 같다. 나에게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냥 나를 연기할 테니까 자영이랑 너무 다른 부분이 있으면 그때 이야기해달라”고 했죠. 그렇게 자영이 완성됐습니다.

<아워 바디> 한가람 감독, 사진 2020 평창국제영화제 제공

한가람 감독의 PICK <벌새> 은희

저도 세 영화 모두 인상 깊게 봐서, 지금도 사실 고민 중이에요.(웃음) 저는 그러면 옆에 웃고 계신 김보라 감독님의 영화로! <벌새>를 재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어요. 아마 국내 첫 상영이었죠? (김보라 감독: 네) 그때 <아워 바디>도 부산에서 첫 상영해서 긴장하고 있었지만, <벌새>가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벌새>를 혼자 가서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어요.

<아워 바디>를 만들 때 <벌새>라는 영화가 탄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이야기로만 듣다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박지후 배우가 연기했던 얼굴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같은 연출자로서 가장 궁금했던 건 캐스팅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이에요. 박지후 배우에게 어떤 면을 찾고 싶었는지. 저처럼 관상을 보신 건 아닐 것 같아서(웃음). 가벼운 질문을 하나 더 하자면 중학생이었던 은희가 커서 고등학생이 됐을 때는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했어요.

김보라 감독 COMMENT “박지후 배우의 투명한 욕망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우선 <벌새>를 뽑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만약 오늘 캐릭터 선택 중에 <벌새>가 없었으면 울고 싶었을 거예요(웃음). 일단 저도 가람 감독님이 희서 배우에게 직감적으로 느꼈던 걸 박지후 배우에게 똑같이 느꼈죠. 농담처럼 관상이라고 이야기는 했지만 저는 그게 에너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지후를 처음 봤을 때 행간을 잘 읽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벌새>가 대사가 많지 않고 대사 사이의 ‘무드’가 굉장히 중요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는데, 지후는 그 호흡을 잘 두고 연기를 하더라고요. 리딩할 때부터 느낌이 좋았는데 오디션이 끝나고 배웅을 할 때였어요. 지후가 갑자기 뒤를 돌더니 “감독님! 저는 볼매에요. 그러니까 다음 오디션에 꼭 불러주시고, 여러 번 불러주셔도 좋아요!”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게 너무 아름다웠어요.

사실 우리 모두 욕망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 살면서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게 늘 부끄럽고 어떨 땐 수치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죠. 하지만 지후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낼 때, 전 너무 감동했어요. 현장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요. 이 아이의 투명한 열망과 다양한 감정들이 저와 지후를 깊게 연결해 주었고요.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서 ‘은희’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국 사회에서 제도라는 것, 특히 모든 학교라는 기관이 사람을 아프게 한다고 느꼈거든요. 면접을 보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던 게 기억이 나요. 제가 항상 모자란다고 느끼고, 늘 뭔가가 낯설고, 내가 너무 열심히 하는 느낌이었고, 중고등학교 땐 항상 왕따가 도사리고 있고요. 물론 행복한 마음도 있었지만 언제든지 무리에서 벗어나면 도태당하거나 왕따당할 수 있다는 게 불안했죠. 실제로 당했던 경험도 있고요. 정말 아팠었죠.

<벌새>를 쓸 때도 유년의 기억을 날것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우리들>을 처음 봤을 때 너무 반가웠어요.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은희가 고등학교로 가면 더 치열하게 제도 안에서 고통을 느꼈을 거라 생각해요. 대학에 가서는… 제 바람은 ‘영지’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은희의 미래를 상상했어요. 한 관객께서 “영지가 미래에서 온 은희고, 둘이 대화를 나눌 땐 미래의 은희와 이야기 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정말 반가운 해석이었어요.

<벌새> 김보라 감독, 사진 2020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제공

김보라 감독의 PICK 모든 작품의 모든 캐릭터

제가 순서가 정말 신기한 게 정말 처음부터 이럴 의도였거든요. 저는 인물 한 명을 뽑지 못하겠어요. 짧게라도 하나씩 모두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각기 다른 이유로 세 작품의 모든 캐릭터가 다 좋았거든요. 정말 정치적으로 대답하는게 아닙니다(웃음)

<우리집>에서는 하나. 하나 역시도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이자 올해의 제 목표이기도 한데요. 저는 올해 오지랖을 많이 부리려고요. 사실 우리는 친구 관계에서 오지랖을 부릴까 봐 건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누군가가 선을 넘어왔을 때 감동했던 순간들이 있었어요. 오지랖일 수 있는 행동인데, 그걸 뚫고 다가왔던 순간들이 정말 큰 위로가 되었거든요. 하나가 어떻게 보면 오지랖일 수 있는 행동들을 유미 자매에게 다가와서 보여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어요.

<아워 바디>에서는 당연히 자영에게 제일 공감이 갔죠. 자영에게 정말 많이 이입했어요. 사실 자영이 영화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죠. 그 선택에 비판도 있었는데, 저는 그 선택이 자영이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안에 있는 욕망 중엔 올바르지 않은 욕망도 있잖아요. 자영이의 모습을 보면서 공감 했었어요. 또 자영이가 건강해지고 싶어하잖아요. 저도 우울증이 심할 때 몸으로서 뭔가를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자영이 운동을 하려는 마음이 뭔지 깊이 와 닿았어요.

<82년생 김지영>에서는 지영과 지영의 언니 은영 모두가 좋았어요. 지영은 내가 방문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아팠고, 은영은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때 태도가 정말 중요한데 은영이는 기분 좋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좋았어요. 은영이 자찬하듯 “학교 애들이 나 되게 좋아해”라고 말할 때 정말 그럴 것 같았어요. 저도 학교 다닐 때 은영과 비슷한 선생님들이 진짜 있었고, 그런 선생님들이 저에게 힘을 많이 줬거든요.

김도영 감독 COMMENT “김지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 우리 모두가 느꼈던 것들이죠”

지영의 모습, 환경, 지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 사실 우리 모두가 느꼈던 것들이죠. 지영처럼 스스로 욕망을 모른 척할 때도 많았고,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며 나름 씩씩하게 살고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사실 마음 안에 그 욕망을 감춰두고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영이 아프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은영은 그런 부분에서 씩씩한 언니죠. 제 주변에서 닮고 싶은 분들의 모습이었어요. 살면서 욕망을 선택할 때도 그런 분들을 보며 따라갔고요. 은영 캐릭터 오디션을 볼 때 공민정 배우가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해줬어요. 다른 배우들도 당연히 이 배역을 하고 싶어서 오디션에 오셨겠지만, 민정 배우만이 제게 “저는 이 역이 너무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어요. 제가 “혹시 작은 역할이 돌아가도 괜찮을까요?”라고 했을 때도 “그래도 되지만 전 정말 이 역을, 너무 하고 싶어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게 이상하게 은영 같다고 생각 했어요. 욕망에 솔직한 순간을 보는 게 굉장히 즐거웠고, 또 공민정 배우가 그 말을 밝고 기분 나쁘지 않도록 유쾌하게 했어요. 그래서 은영 역에 캐스팅했죠. 저도 배우였잖아요. 은정 배우를 보면서 왜 내가 그동안 오디션에 떨어졌는지 좀 깨달았어요.(웃음) 자신의 욕망을 순수하게 드러낼 때 그 건강함이 저에게 굉장히 좋게 와 닿았죠.

뒷모습에서 얻는 확신, 옆모습에서 얻는 용기

‘운이 좋다면’ 우리 삶에 방향을 제시하는 인물이 바로 옆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영화 속 여성 인물들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주죠. 그렇다면 여성 감독들은 어떨까요. 한국 사회, 그리고 영화계에서 여성이자 감독으로 살다 보면 나보다 반 발자국이라도 먼저 내디딘 존재가 더욱 간절하지 않을까요? 네 감독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분명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신을 주는 선배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알려주는 동료들도 정말 소중해요. 용기를 주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너무 행복합니다.”

왼쪽부터 김도영 감독, 윤가은 감독, 한가람 감독, 김보라 감독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제공)

윤가은 감독) 좋아하는 여성 감독님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돼요. 운이 좋게도 영화를 하면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찾아뵙는 선배 감독님이 계세요. 학교 선배님이기도 한 이정향 감독님.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거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씀하시죠. 굉장히 큰 힘이 돼요.

동료 감독을 만날 때마다 ‘다 나같은 마음이구나’라는 걸 느끼죠. 다 똑같이 불안하고 힘들었구나. ‘이 이야기가 맞나?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나?’ 동료들을 만나서 영화를 만들면서 했던 고민을 나눌 때가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정말 힘이 돼요. 서로 뭔가를 제시해주지 않아도, 이 고민이 나만의 것이 아니구나, 괜찮은 거구나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죠. 그래서 이런 시간이 정말 좋고, 또 필요한 것 같아요.

한가람 감독) 저는 영화를 늦게 시작한 편이에요. 영화 전공도 아니고, 30대가 되어서야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았어요. 그래서 가장 힘들었던 건 아는 사람이 없었던 거? 독립영화를 만들 때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다 졸업하고 나서 처음으로 상업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학교 울타리 안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되게 쉬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죠.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기획된 프로젝트 안에서 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또 어딜 가면 제가 감독일 거라 생각을 못하더라고요. 헌팅을 가도 “이거 학생영화예요?” “감독님은 안 오셨나 봐요”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친구들이 농담처럼 “감독 완장 같은 거 하나 차고 다니라”고 얘기 하거든요(웃음)

‘감독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실 이런 형식적인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 했어요. 그래서 더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거죠. 이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어떤 시나리오를 써야 사람들이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지, 영화를 오래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우리 엄마들의 모든 것

엄마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지극한 모성애, 희생, 성녀, 구원자 혹은 그리운 얼굴? 하지만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 서사 영화에서 ‘엄마’는 가장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합니다. 네 감독이 영화 속 ‘엄마’ 캐릭터에 담긴 의미와 주인공에게 미친 영향에 관해 답합니다.

<82년생 김지영>(2019)

김도영 감독) 지영의 엄마 ‘오미숙’은 최대한 원작에 충실히 하려고 했어요. 그러면서도 오미숙이 지영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82년 생 김지영’ 이전 시대의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캐릭터를 만들어갔습니다.

한가람 감독) 저는 사실 자영이 엄마로부터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엄마가 자영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공무원이 될 것이라는)로부터 벗어나는 게 중요했죠. 그렇지만 엄마는 엄마대로 자영에게 기대할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자영이 엄마에게서 조금씩 벗어나는 과정을 천천히 그리고 싶었어요.

김보라 감독) 저는 한국 사회에서 엄마라는 존재는 가스라이팅을 하면서 동시에 애정을 주는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 자체가 거대한 가부장제 매트릭스 안에 있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가스라이팅을 당한 경험들이 있는 사회라고 생각했는데요.

그중에 엄마라는 존재는 가부장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여성이 엄마가 되죠. 아이를 굉장히 사랑하는 동시에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아이 편을 들어주기도 하지만 가부장제를 철저히 옹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굉장히 복잡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제겐 복잡한 위치에 있는 한 개인을 나쁜 사람으로 몰지 않는 게 정말 중요했거든요.

<벌새>에서도 엄마가 오빠에게 맞은 은희에게 싸우지 말라고 하지만 사실 엄마는 알고 있단 말이죠.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인 것을. 본인이 그 사실을 직면하기에 너무 아프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존재죠. 그런데 아이에게 감자전을 주고 아이를 위해 뼈가 부러지도록 일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동시에 있어요.

저는 그게 굉장히 애처롭다고 느꼈어요. 그런 복잡한 캐릭터를 애정을 가지고 그리고 싶었어요. 나쁜 엄마 혹은 애증의 관계를 떠나서 한 개인이지만 굉장히 복잡한 관계망과 세계 속에 살고있는 여성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윤가은 감독) 저한테는 굉장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어른들이 굉장히 소외되어있거든요. 저는 <우리집>에서 우선 하나 엄마가 일하는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흔히 엄마들은 다정하고 따뜻하다는 생각에, 저는 다른 태도를 견지하고 싶었어요.

아이가 느끼기엔 부드럽고 편한 엄마는 아닐 순 있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자기 일도 소중히 여기는. 그리고 집안에서 엄마에게 주어진 역할이 많은데 그걸 또 수행하려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굉장히 크죠. 그런 여러 지점을 배우와 많이 이야기 나누면서 표현하고 싶었어요.

가장 개인적인, 그래서 더욱 보편적인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연출자 삶의 조각을 닮기 마련입니다. 특히 직접 쓴 이야기에는 자신의 모습이 더 많이 투영되곤 합니다. 창작자 개인의 상처나 아픔, 개인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선택입니다. 과연 어디까지 개인의 이야기를 담아야 할까. 네 감독은 모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더 자신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아워 바디>(2019)

한가람 감독) 사실 자영에게 공감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웃음) 자전적인 시나리오를 쓰면서 스스로 ‘이 이야기가 한 단계 나아졌구나, 발전했구나’라고 여실히 느꼈던 때는 내가 차마 쓰지 못할 것 같았던 부분까지 썼을 때입니다. ‘내가 이런 부분까지 쓰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영화가 한 단계 나아졌다고 여겼습니다.

윤가은 감독)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한가람 감독과 비슷한 것 같아요. 한계를 지어야 하나?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자전적 경험을 그대로 만들 때도 있지만, 이야기와 인물이라는 건 영감을 받아서 재창조하는 거잖아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 나를 재료로 쓸 수 있다면, 그건 너무 다행이고 행운인 거죠. 그 안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할 것인지가 핵심인 것 같아요. 한계 없이 들여다보고, 가치를 건져내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제 영화를 보면서도 ‘아, 저기선 좀 더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하는 부분이 있어요. 솔직하지 못했던 거죠. 이젠 고칠 수 없으니까 많이 아쉬워요. ‘좀 더 용감했더라면, 아프지만 좀 더 들여다보고 깊이 건져 올렸더라면’ 이렇게 생각했던 부분이 많죠. 그래서 <아워 바디>를 보면서 더 자극받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다른 분들의 영화에서도 이런 솔직하지만 용감한 장면들을 보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가장 많이 해요.

<벌새>(2019)

김보라 감독) 윤가은 감독님의 말이 정말 와 닿았어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벌새>는 자전적인 내용이 부분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특히 가족 간의 관계, 내가 느꼈던 감정선들은 그 시절에 제가 느꼈던 그대로예요. 단, 원칙은 ‘미움이 남아있지 않을 때 표현하자’ 였어요.

<벌새>를 만들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가족들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제 어린 시절을 재방문했어요. 명상도 많이 했고요. 덕분에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벌새>가 관객 14만 명이라는 좋은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이 영화를 통해 제가 받은 선물이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혈연이어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을 제3자로서도 사랑하게 된 거에요.

작가이자 만화가 앨리슨 벡델도 자전적인 만화를 그릴 때 “미워하고 복수하고 싶을 때는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저도 여기에 동의해요.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사랑하면서도 내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들을 묘사하면서 사랑할 수 있을 때 하자, 그게 제 이야기를 쓰면서 한 결심이었어요. 

<자유연기>(2018)

김도영 감독) <82년생 김지영>은 저에게 예외적이었어요. 자전적이기보다는 저와 제 주변 모든 여성, 남성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둘러보면서 보편성을 담았죠. 그보다 이전의 단편 <자유연기>(2018)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그 이전엔 단편 작품들을 만들면서 저와 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상상하며 그게 즐겁다고 생각했었죠. 그러다 한번은 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털어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자유연기>에서 제게 일어났던 일을 썼죠.

사실 처음 발표할 땐 너무 부끄러웠어요. 이 이야기가 내 이야기인 걸 모두 알텐데, 나의 어떤 순간을 모든 사람이 본다는 게 좀 민망했어요. 그렇지만 돌아보니 그 순간 굉장히 용감했었죠. 나중엔 ‘그러라지 뭐. 내 일기장을 보렴. 나는 이런 일이 있었어.’ 이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자유연기>를 상영하면서 가장 놀랐던 건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 나만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그것도 특수 직업군인 배우 이야기에 많은 분이 공감해주시는 거예요. <자유연기>가 관객상을 받았거든요. 그걸 보면서 저도 다른 감독님과 똑같이 생각했어요. ‘더 용감하게 바닥까지 내려갈 걸. 용기가 좀 더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른 친구들의 작품을 볼 때도 자신이 드러낼 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시나리오를 쓸 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른쪽부터 김보라 감독, 한가람 감독, 윤가은 감독, 김도영 감독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제공)

글 박혜진 에디터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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