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린

은막의 요정, 오드리 포에버

classic star,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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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순 없지만, 시간을 초월할 수는 있습니다. 클래식의 힘이죠. 오드리 헵번은 그 자체로 ‘클래식’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낡기는커녕 점점 새로워집니다. 끊임없이 오드리 헵번의 고전 영화가 ‘기획전’ 형식으로 스크린 위에서 살아나는 이유이기도 하죠. 숏컷과 아이스크림, 담뱃대와 진주목걸이, 통기타와 문리버, 집채만한 모자와 드레스.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는 헵번은 이런 이미지 조각을 넘어, 여성 서사의 새로운 도전으로서 클래식이 된 그의 가치를 일깨웁니다. 편집자 주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들은 많지만, 오랫동안 대중의 가슴에 추억으로 살아 숨쉬는 배우는 흔치않다. ‘오드리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오드리 헵번은 이전 할리우드 여배우들과는 전혀 다른 깜찍한 요정의 이미지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도 변함없이 ‘요정’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스크린 밖에서도 천사와 다름 없었던 그녀의 인간미 때문이다.

1990년 일본외 모 영화 잡지는 매해 실시하는 독자선정 Best 10을 투집으로 게재했다. 한해 동안 일본 영화팬들이 가장 사랑했던 여배우 10인에는 물론 줄리아 로버츠나 위노나 라이더같이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젊은 스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흥미로웠던 것은, 날고 기는 젊은 여배우들 사진 사이에 빛 바랜 컬러 사진 하나가 끼어 있었다는사실이었다. 촌스러운 분홍색 바탕에 미니멀한 모자를 쓴 커다란 눈망울의 여배우, 오드리 햅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년도인 1989년에 그녀의 마지막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 곁에>가 개봉되었다는 사실은 접어두고서라도, 환갑을 넘은 여배우가 그해 독자선정 Best 10 순위에 오른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오드리를 죽지 않는 요정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은 유달리 커다란 그녀의 눈망울이나 카프리 팬츠를 입고 사뿐하게 움직이는 몸짓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대중들로부터 요정의 이름을 얻었고, 죽는 순간까지 요정의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다. 배우인 렉스 리드의 말마따나 “이 잔인하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오드리는 신이 여전히 완벽한 창조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오드리 케이들린 헵번-리스턴은 1929년 5월4일 부유한 영국의 은행가인 존 빅터 헵번-러스턴과 네덜란드의 후작 부인 엘라 반 햄스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우아함은 부유한 가정환경과 모계의 혈통에서 물려받은 태생적인 것이다. 교육열이 상당했던 오드리의 모친은 그녀를 최고의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했으며, 발레에 재능을 보였던 오드리는 발레 학교에서 수학하게 된다. 그러나 부모의 이혼 이후 런던에서 네덜란드로 거처를 옮기면서 유럽을 강타했던 2차 세계대전의 물결은 오드리에게도 시련을 안겨주었다. 나치 전령하의 네덜란드에서 성장기를 겪은 오드리는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상당한 고통을 겪었고, 이러한 기억은 훗날 그녀가 <안네 프랑크의 일기>의 안네 역을 제안받았을 때 출연올 고사한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오드리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발레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계속하는 동시에, 모델 생활을 시작한다. 10여년 동안의 발레 수업을 통해 몸에 밴 우아한 몸짓과 모친으로부터 물러받은 작고 마른 몸매로 오드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각광받는 모델로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성공은 그녀를 또 다른 도전으로 이끌었다. 몇 편의 영국 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비록 당시 오드리가 말았던 배역은 고작해야 코리스 걸 같은 단역이 대부분 이었지만, <1951년 젊은 아내들의 이야기>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대사가 있는 배역을 맡은 이후 그녀는 배우로서의 삶에 운을 걸어보기로 작정하고 미국으로 향한다. 

전세계를 휩쓴 오드리 신드롬 

스무 살의 젊은 오드리에게 미국은 처음부터 기회의 땅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1951년 그녀는 바로 브로드웨이에서 <지지>의 주연을 맡는 커다란 행운을 거머쥔다. 발군의 춤 솜씨와 노래 실력을 가진 오드리는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하는 지지 역할을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소화해 냈다. 그리고 이 성공으로 인해 그녀는 1953년 드디어 할리우드에 당당히 주연으로, 그것도 모든 여성들이 꿈에나 그릴 만한 유럽의 작은 나라 공주 역할로 스스로를 알릴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녀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이 첫번째 영화로 그녀가 스타덤에 오르게 될지, 그리고 그 첫번째 영화가 그녀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영화로 자리잡게 될지 상상하지 못했다. 윌리엄 와일러의 동화 같은 로맨스 <로마의 휴일>은 개봉 당시 미국에서 커다란 흥행을 기록하면서, 오드리를 일약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 시켰다. 오드리 신드롬은 대단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짧은 고수머리는 일약 ‘헵번 스타일로 이름 붙여져 전 세계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되었고, 급기야 그녀는 이듬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루기도했다. 한편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자신에게도 캐리어 이상의 의미를 가진 영화이기도 한데, 이 영화를 통해 그녀는 그레고리 펙과 위베르 드 지방시라는 평생의 친구를 얻게 된다.

오드리와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디자이너 지방시. © 스크린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를 단번에 스타덤에 올려 놓은 히트작임과 동시에, 그녀의 페르소나를 결정한 영화다. 어떤 여배우도 공주나 요정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역할로 인해 죽는 순간까지 요정으로서의 페르소나를 유지하는 배우란 흔치 않다. <로마의 휴일>의 성공 이후 오드리는 계속 요정의 이미지 를 발전시켜 나갔고, 마침내 빌리 와일더의 로맨틱 코미디 <사브리나>와 만나게 된다. 운전사의 아름다운 딸이 결국 부잣집 도련님과 맺어진다는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인<사브리나>는 그녀의 요정 페르소나에 재투성이 말괄량이에서 성숙하고 우아한 여신으로 변신하는 ‘신데렐라’의 이미지를 덧입혀 주었다. 이 ‘미운 오리 신데렐라’의 이미지는 이후 오드리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가되어 스탠리 도넌의 뮤지컬 <퍼니 페이스>(57)와 조지 쿠커의 <마이 페어 레이디 >(64)에까지 이어졌다. 이 영화들을 통해 오드리는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신데렐라 캐릭터의 원형을 만들어 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오드리의 요정 이미지가 절정에 이른 <마이 페어 레이디>의 일라이자 역할을 맡았을 당시, 오드리는 벌써 35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에게 그녀는 여전히 요정이고 신데렐라이며 공주였다.

현실의 섹스 어필을 넘어선 천상의 매흑

오드리의 요정 이미지는 그녀의 페르소나가 가진 또다큰 이면을 가리워주기도 했는데, 그것은 바로 섹스 어필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오드리가 활동하던 5~ 60년대 할리우드는 여배우들에게 섹스 어필이라는 단 하나 의 미덕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진 할로우에서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팔등신 몸매와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는 여배우들에게 있어 스타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말랐다 싶을 정도로 왜소한 몸매의 오드리는 할리우드와 대중이 요구하는 스타의 조건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고전적인 잣대로 보았을 때, 오드리의 얼굴은 결코 미인형에 포함되지 못했다. “나는 나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영화 배우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녀 스스로 고백한 바 있듯이, 오드리의 얼굴은 지나치게 작았고 반면 눈은 지나치게 컸으며, 짙고 굵은 눈썹은 처치 곤란이었다.

 현실의 섹스 심볼이 아닌 천상의 요정. 사실 이러한 오드리의 이미지는 단지 그녀의 외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차지하는 많은 로맨틱 코미디들은 성적인 암시들이 최대한 제거된 그야말로 동화 같은 영화들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오드리와 사랑에 빠지는 상대들이다. 동급의 빅 스타들과 성적인 화학반응을 이끌어 내던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영화속 오드리의 로맨스는 늘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많은 연상의 배우들과 이루어졌다. <사브리나>의 험프리 보가트, <퍼니 페이스>의 프레드 아스테어를 거쳐 <하오의 연정>(57)에 이르면 활영 당시 56세였던 게리 쿠퍼와 커플을 이루게 된다. (<마이 페어 레이디>의 렉스 해리슨 역시 촬영 당시 56세였다) 그러나 엄청난 나이 차를 사이에 둔 오드리와 상대 남자 배우들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은, 오드리가 가진 요정 이미지의 이면에 있는 비성애적(asexual) 이미지 때문이다. 오드리 자신도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중에서 가장 성적인 코드가 짙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출연하면서, 오드리는 촬영 내내 자신이 미스 캐스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중과 할리우드, 그리고 오드리 모두 그녀를 섹스 심볼로 만들길 원치 않았다. 그녀의 남자들은 단지 그녀를 최대한 사랑스럽게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다. 로맨스라는 환상의 공간에서, 오드리는 그 자체로 자족적인 존재가 된다. 바로 이점이야말로 오드리의 로맨틱 코미디들을 독특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다. 

스크린의 요정에서 현실의 성녀로

그러나 사실 오드리는 스스로의 삶이 반드시 요정 이야기 같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의 삶은 요정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정말 많은 고비와 어려움을 겪었죠. 하지만 그 고비를 겪을 때마다 늘 마지막에는 그에 대한 보답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두 번의 결혼과 그를 통해 얻은 두명의 아들은 요정 오드리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사뭇 평범한 여성의 삶처럼 들리지만, 그녀에게 아이들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사브리나> 촬영 당시 오드리는 월리엄 홀덴과 잠깐 동안 사랑에 빠졌었지만, 홀덴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그를 떠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실제로 오드리는 67년 <어두워질 때까지>를 마지막으로 76년 <로빈과 마리안>으로 컴백할 때까지 육아를 위한 공백기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자신이 낳은 자식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오드리는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위촉되어 기아와 고통에 시달리는 전세계의 아동들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93년 스위스의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하기까지, 그녀는 5년 동안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직접 찾아가 그곳의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도움과 애정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94년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은 오드리 헵번 아동 기금은 창설하였다. 스크린을 떠났을 때조차, 오드리는 천사 그 자체였던 셈이다.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은 스크린 바깥의 오드리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멋진 사람이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음악을 맡았던 헨리 맨시니는 오드리 헵번을 이렇게 기억 한다. “’문 리버’는 순전히 그녀를 위해 쓴 곡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곡을 완벽하게 이해했어요. 이후 많은 가수들이 이 곡을 불렀지만, 의심할 여지없이 오드리가 그 중에서 최고입니다.” 사진작가 리처드 애비던에 따르면, ‘오드리는 대중들에게 자신이 보이길 원하는 방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여성’ 이다. 평생 지우였던 디자이너 위베르 드 지방시는 오히려 간단하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녀는 모든 면에 있어서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독특함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죄로, <오드리 헵번 이야기>라는 전기영화에서 용감하게 그녀 역할을 맡았던 제니퍼 러브 휴이트에게 비아냥의 화살이 쏟아진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오드리는 그녀 자신이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그토록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그건 그저 일일 뿐이지, 결코 현실은 아니거든요.” 그러나 그녀의 겸손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녀는 여전히 천사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공주 드레스를 입었건, 너덜거리는 넝마를 걸치고 밀림을 뛰어다니건, 혹은 까만 카프리 팬츠를 걸쳤건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불멸의 존재이자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존재다. 빌리 와일더의 말이다. “사람들은 오드리 같은 배우는 충분히 흉내낼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오드리가 내뿜는 공기는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 <프리티 우먼>을 보았습니다. 줄리아 로버츠에게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녀는 결코 오드리에게 필적할 상대가 못돼요. 줄리아, 미안하지만 지방시 드레스는 당신의 몫이 아니랍니다.”

오드리 헵번의 숨겨진 걸작

아이들의 시간 The Children’s Hour
감독: 윌리엄 와일러
주연: 오드리 헵번, 셜리 맥클레인


헵번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로마의 휴일>의 감독 윌리엄 와일러와 함께 호흡을 맞춘 드라마. 친구이자 동료로 작은 학교를 함께 운영하는 카렌과 마사.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에 있는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돌고, 학교도 가정도 모두 잃을 지경에 이른 두 사람은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애를 쓴다. 릴리언 헬만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는 사실 이미 30년대에 와일러에 의해 영화화된 바 있지만, 당시의 분위기로 인해 레즈비어니즘이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에 만족하지 못했던 와일러가 다시 한번 원작에 충실한 영화화를 기획한 것. 기존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른 헵번의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1962년 아카데미 5개 부문 후보작.

하오의 연정 Love in the Afternoon (1957)
감독: 빌리 와일더
주연: 오드리 헵번, 게리 쿠퍼


<사브리나>의 빌리 와일더가 다시 헵번을 기용한 로맨틱 코미디.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지명도가 낮지만, 헵번의 천진난만한 말괄량이 이미지가 잘 살아 있는 작품. 첼리스트인 아리안느는 사랑스러운 파리지엔느. 어느 날 그녀는 사립탐정인 아버지와 고객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아내와 불륜을 맺고 있는 플래니건(게리 쿠퍼)이라는 사내를 추적해 달라는 것. 호기심이 발동한 아리안느는 직접 플래니건을 찾아 신분을 위장한 채 접근하지만, 초로의 바람둥이인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플래니건 역할로 캐리 그랜트나 율 브리너 같은 배우들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도 매력적인 게리 쿠퍼는 한창 때의 헵번과 비범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햅번은 첼리스트인 아리안느 역을 맡기 위해 실제로 첼로 특강을 받았다고.

<스크린> 2003년 3월 호  |  글 박진형(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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