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우리말로 넓힌 시대의 보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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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이 달랐으면 어땠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이자 말을 모은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 ‘말모이’가 풍기는 생소함이 크다. 제목의 깊은 뜻을 알고나서도 극중 대사처럼 “말모인지 소모인지”하는 영화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국사 시간에 배웠던 조선어학회 이야기인데 주시경 선생은 잠깐 등장할 뿐 주인공은 따로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게 진입 장벽이 만만찮은 영화가 막상 마주하고 나면 진득하게 만든 역사극이자 웃음과 눈물을 낭비하지 않는 대중 영화여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함께 든다.

일제강점기 배경인 많은 영화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실존 인물이나 총칼을 든 독립운동을 주로 다뤘다. 하나같이 항일정신을 담았지만 전기 영화나 블록버스터의 외피를 두르면서 고착화 되어 갔다. 시대는 인물의 심리나 상황을 자극하는 역할에 그치거나, 장르의 규모를 키우면서 주제는 퇴색한 본말전도 영화도 적지 않았다.

<말모이>2019

<말모이>는 정면 돌파로 일제강점기 영화의 전형성을 벗어난다. 영화는 ‘말과 글을 지킨다’는 자칫 거창해보일 수 있는 주제를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가면서 보편성과 대중성을 얻는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인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창씨개명이 어떻게 개인의 삶에 스미고 뿌리를 흔드는지를 인물과 밀착시켜 보여주기 위해 공을 들인다.

까막눈에 감옥소에 드나들던 말썽꾼 김판수(유해진)가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을 만나 세상에 눈을 뜰수록 점점 더 어두워지는 상황의 대비도 절묘하다. 판수가 일하는 극장 상영작이 인기 신파극에서 어용 영화로 바뀌고, 한글을 깨우치는 재미에 빠지고 조선어학회 일에 관여할수록 애지중지하는 아들 덕진(조현도)과 관계는 나빠지는 식이다.

<말모이>2019

여기에 정환과 아버지(송영창)의 대립 관계가 얹어진다.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 명대사인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아들에게 얘기했던 아버지는 “30년이 지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며 독립이 아닌 친일을 강요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이중으로 진행하면서 부성애를 강조하거나 신파로 흐르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도 영화의 미덕이다.

웃음과 눈물을 다루는 방식도 주의 깊다. 웃음은 주로 단어의 뜻을 표현하는 동작이나 설명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데 말맛을 살려내는 유해진의 전매특허 연기가 제대로 맞아떨어져 웃음의 폭이 넓어진다. 반면 눈물은 ‘미안함’에서 나온다. 사람 귀한 줄 모르고 판수를 함부로 대했던 정환이 사과할 때, 우리보다 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판수가 정환 앞에서 미안하다고 울먹일 때, 결국 판수가 아들에게 덜 미안한 결정을 내렸을 때, 인물들은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한걸음 내딛는다.

<말모이>2019

이처럼 전형적인 성장의 플롯을 따르면서도 <말모이>는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 할 줄 아는 귀한 영화다. 깨닫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목소리만 전달할 뿐 미사여구를 허락하지 않는 대사는 대중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웃음의 말모이, 눈물의 말모이, 맛깔 나는 말모이’라는 영화 홍보 문구 같은 대사가 확연히 와 닿는다.

제목이 좀 더 친근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았을까. 이제는 영어가 자연스레 들어가는 참여자 명단(엔딩 크레디트)을 일일이 한글로 표기하면서 영화의 정체성을 완성하고자 한 노력에 <말모이>를 더욱 지지하고 싶어졌다.

에디터 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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