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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 인생 한 모금

‘작심삼일’이라도 해보자던 신년 다짐도 가물거리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좀 달라지고 싶었는데 역시 ‘이번 해도 망’한 걸까요? 늦지 않았습니다. 새봄이 찾아오는 지금이 마음 먹고 움직이기 딱 좋은 시기입니다. <더 스크린>의 ‘다짐 패키지’가 도움이 되실 겁니다. 편집부

다짐 패키지 #4

<일일시호일> 2019 x

<매일 매일 좋은 날> 랜덤하우스코리아

우리는 잘 모르는 것 일수록 섣불리 ‘쓸 데 없다’고 단정하는 버릇이 있다. 대표적으로 ‘다도(茶道)’가 그렇다. 음료 한 잔 마시는데 ‘도道’까지 따질 일이냐는 말도, 지나치게 형식적이란 비판도, 한량의 신선놀음이라는 인식도 일리는 있다. <일일시호일>에서 처음 다도를 배우러 간 노리코(쿠로키 하루)도 다실 다다미 한 장을 정확히 여섯 걸음으로 밟아야 한다는 형식에 기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리는 다도를 잘 모른다. 세상의 많은 일은 ‘그것을 모른다’는 걸 아는 깨침에서 시작된다. 오모리 타츠시 감독의 영화 <일일시호일>과 그 원작이 된 모리시타 노리코의 에세이 <매일 매일 좋은 날>은 그에 관한 이야기다.

<일일시호일>2019 © 영화사 진진

영화와 책 모두 스무 살 노리코가 우연히 집 근처 다실을 운영하는 다케다 선생님을 만나 다도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소담한 이야기다. 무려 25년 동안! 계절이 바뀌고, 나이가 들고, 사랑에 실패하고,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경험하며 25년 동안 매주 다실에 간다. 흥미 만으로는 결코 지속할 수 없는 시간이다. 영화와 책을 만나는 자세를 조금 고쳐 잡게 된다.

대체 그 안에 무엇이 있길래? 궁금해졌다면 영화와 원작 에세이 패키지를 같이 보는 게 훨씬 좋다. 종종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감흥을 흩트리는 경우도 있지만, <일일시호일>은 다실의 족자와 화과자처럼 함께할 때 훨씬 풍요로워진다. 순서를 꼽자면 영화를 먼저 눈으로 맛보고 책을 읽으며 음미하는 게 좋겠다.

<일일시호일>2019 © 영화사 진진

영화 <일일시호일>은 100분의 러닝타임 안에 노리코의 25년을 일본의 정형시 하이쿠처럼 정갈하게 담았다. 고요한 다실에 찻물 끓는 소리, 다다미 안으로 넘어오는 봄볕, 정원 너머 댓잎을 흔드는 바람, 어느새 물든 단풍, 눈이 고요하게 소복소복 쌓이는 풍경과 함께 흐르는 듯 쌓이는 시간을 지켜볼 수 있어 좋다.

노리코 역의 쿠로키 하루와 다케다 선생님 역의 키키 키린의 단정한 연기가 장면마다 또렷한 마침표를 찍는다. 더할 나위 없는 캐스팅이다. 고(故) 키키 키린의 군더더기 없는 몸가짐은 “인사의 결이 다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즉각 알게 만든다. 쿠로키 하루의 ‘축이 바른 몸’은 인생에도 초보였던 노리코가 점차 단단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담기에 딱 좋은 그릇이 된다.

<매일 매일 좋은 날> 랜덤하우스코리아 © 더 스크린
<매일매일 좋은 날> 랜덤하우스코리아

다도를 눈으로 즐긴 다음, 모리시타 노리코의 에세이 <매일매일 좋은 날>을 읽으면 밑줄 치고 싶은 문장들을 곱씹는 맛이 커진다. 다도 입문서로도 훌륭하다. 그녀 역시 우리처럼 다도를 “하나의 예법”으로 생각했고, “사람을 틀에 가두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해도 해도 나아지지 않는” 실력에 자포자기한다. 그렇게 십수 년을 배운 뒤 다도를 그만두려던 노리코는 “보이기 전까지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듣게 된다.

분명 어제까진 똑같이 들렸던 쪼르륵 찻물 내리는 소리가 다르게 들리고, 족자의 선문답 글귀가 마음을 흔든다. “그냥 일단 하세요. 몸이 알 거예요”라는 다케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손이 먼저 움직이는 걸 느끼면 그제야 특별할 게 없었던 매일매일이 쌓여 도착한 오늘이 눈물 나게 고마워진다.

<일일시호일>2019 © 영화사 진진

영화 <일일시호일>과 에세이 <매일매일 좋은 날>은 ‘다도’라는 형식에 담긴 삶에 대한 예의를 일깨운다. 별다를 것 없고 때론 불친절한 매일에 마음과 예의를 다하면, 세상도 내게 예의를 갖춰 다른 것을 보여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의 다름, 24절기의 다름, 어제와 오늘의 다름이 보이는 순간, 다신 만날 수 없는 오늘은 그 자체로 얼마나 좋은가.

꼭 일본식 다도를 배우지 않아도 괜찮다. 마음을 담아 차 한잔을 끓이고, 어제와 다른 오늘에 예의를 갖춰보자. 노리코의 말처럼 “긴 안목을 갖고 현재를 사는” 사람에겐 매일매일이 좋은 날이다.

editor 유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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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