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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영화에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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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004

봄볕이 쏟아지는 일요일 한낮, 집 창밖 텅빈 거리를 내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습니다. 분명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진공의 거리가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거리도, 영화관도, 시장도, 식당가도 텅 비었습니다. 반면 마스크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TV를 켜면 국내외 할 것 없이 뉴스 화면에 빨간 띠를 두른 ‘속보’가 깜박입니다. 지난 1월 20일, 한국에서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지 한 달 여. 일상의 풍경은 굉장히 비현실적인 동시에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합니다. 야속하게도 ‘재난 영화’의 오프닝 같죠.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면서부터 재난의 기록을 빼놓지 않았던 것처럼, 영화가 발명된 직후부터 수많은 재난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영화 속 재난의 얼굴은 실로 변화무쌍합니다. 불, 물, 화산 폭발, 지진과 쓰나미, 기상 이변, 동물의 습격 같은 대자연의 폭주, 높은 빌딩과 비행기 혹은 거대한 배가 불타고 추락하고 좌초하는 끔찍한 사고, 우주에서 찾아온 적대적 외계 생명체의 습격, 죽은 자를 죽지 못하게 만드는 전염병, 신화적 종말 같은 상상의 재난, 핵전쟁, 소행성 충돌, 인공지능의 지배, 대정전 그리고 치명적 바이러스 창궐 같은 과학적 재난까지. 영화 창작자들은 마치 재능을 뽐내듯 재난을 발굴하고 창조해 왔어요.

재난을 오락으로 둔갑시키는 악취미라고 여기실 수도 있습니다. 재난을 스펙터클로 전시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못난 영화도 있죠. 하지만 ‘재난 영화’의 편을 좀 들자면, (인류의 모든 창작물이 그려온) 재난은 우리가 한번은 답을 해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반복될 줄만 알았던 안온한 문명 시스템이 멈춘다면, 그래서 오직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버드 박스>(2018) ©NETFLIX

<버드 박스>(2018)는 잔뜩 긴장한 맬러리(샌드라 블록)가 두 눈을 가리고, 역시 두 눈을 가린 두 아이를 들쳐 메고 ‘생존의 땅’을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세계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보면 사람들이 자살하고 마는 괴이한 재난으로 인류 스스로 멸망해가는 중입니다. 처음엔 두 아이가 맬러리의 아들딸인 줄 알았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서도 쉽지 않은 ‘깜깜한’ 피난길에 저런 고생을 마다할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영화가 하나씩 비밀을 털어놓을 때마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답을 하나씩 얻어갑니다.

문명 따윈 순식간에 밑천을 드러냅니다. 속이고 의심하고 분열하다가, 물병 하나를 두고 아귀다툼이 벌어지죠. 누군간 혼돈 속에서 이익을 챙기고, 또 누군가는 저만 살겠다고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고, 누군가는 자포자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는 영화는 없어요. 끝내 무너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을 다독이고, 타인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절체절명의 순간 가장 약한 아이들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재난 영화의 주인공 옆에 반드시 아이들이 있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재난 영화의 불문율이죠. 카오스에서 약자를 지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재난 속에서도 인간답게 무너지지 않을 ‘유일한 생존법’이기 때문입니다.

현실로 눈을 돌려도 마치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수천 명을 훌쩍 넘어선 확진자 수, 야속하게 멈추지 않는 사망자 수, 그걸 기록 중계하느라 바쁜 뉴스와 이 난국에도 비협조적인 사람들, 전 세계로 빠르게 퍼지는 바이러스까지. 낙담하고 포기할 이유가 수도 없지만, 현실에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자진해서 환자를 돌보러 떠나는 의료진, 모든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질병관리본부 전문가들, 소외된 아이들에게 보낼 마스크를 먼저 챙기는 사람들, 오매불망 기다렸을 콘서트 티켓 취소 비용을 기부하는 팬들 그리고 폐쇄니 봉쇄니 하는 판국에 ‘병상을 내주겠다’고 병원 문을 여는 광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선택이 우리 모두를 무너지지 않게 합니다. 재난에서 인간답게 살아남는 법. 영화는, 아니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2020년 3월 2일

박혜은 편집장 드림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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