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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25개월을 기다리며

‘작심삼일’이라도 해보자던 신년 다짐도 가물거리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좀 달라지고 싶었는데 역시 ‘이번 해도 망’한 걸까요? 늦지 않았습니다. 새봄이 찾아오는 지금이 마음 먹고 움직이기 딱 좋은 시기입니다. <더 스크린>의 ‘다짐 패키지’가 도움이 되실 겁니다. 편집부

다짐 패키지 #2

펠리시모 500색 색연필 구독

하루는 왜 24시간이고, 2월은 왜 28일이며, 1년은 왜 12개월인 걸까? 갑자기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신경질적으로 떠올리는 이유는, 벌써 2019년의 두 달째 달력이 넘어가서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겨보겠다고 일력을 장만했다가 떼는 것도 잊어서 며칠 전에 머물러 있는 날짜를 볼 때도 비슷한 낭패감이 치민다. 분명히 지난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하긴 한 것 같은데, 아니 분명히 뭘 했는데, 왜 내 손에 쥐어진 것 없이 시간이 사라진 것만 같을까.

펠리시모 500색 색연필 221-240 FRUITFUL 패키지 © 더 스크린

매년 반복되는 자괴감을 느끼다가 지난해 가을, 우연히 아주 색다른 솔루션을 발견했다. 일본의 팬시 잡화 판매 사이트 펠리시모 FELISSIMO의 500색 도쿄 시즈(TOKYO SEEDS) 구독 서비스다. 일본의 색연필 장인들이 하나하나 수작업한 500 색상의 색연필을 20자루씩 25개월 동안 보내준다.

‘예쁜 쓰레기 수집’ 아니냐는 핀잔도 받았지만, 실물을 보여주자 다들 수긍했다. 수작업으로 만든 색연필은 필기구 덕후를 넉다운 시키고도 남을 퀄리티다. 미세한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색감, 발색, 두께, 쥐는 맛, 심의 경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 때  ‘딸깍’하는 탄력까지 마음에 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색연필’ 구독이 아니라 기획력 구독이다. 1부터 500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진 색연필에는 각각의 이름이 있다. 한번에 20자루씩 패키지가 배달되는데, 하나의 키워드와 한 장의 사진으로 20가지 색을 아우르는 기획력이 탁월하다. 케이스를 열면 디테일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색연필의 일련번호 순이 아니라, 한눈에 봤을 때 가장 조화로운 색 배열로 담겨있다. 간단한 색칠용 종이 공예 샘플도 함께 온다.

펠리시모 500색 색연필 321-340 SOPHISTICATED 패키지 © 더 스크린

전체 500개의 일부를 나눠 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25개의 완성된 아이템이 모여 500색을 구성하는 개념이다. 패키지 하나를 받을 때마다 단조로운 세상이 색으로 풍성해지는 듯한 자극을 받는다. 20개 패키지의 가격은 2800엔으로 해외 배송료 1000엔이 붙는다. 싸진 않지만, 아깝지도 않다.

직업상 다양한 유료 구독 서비스를 이용한다. 어도비 프로그램이나 산돌구름 같은 프로그램부터 넷플릭스, 애플 뮤직, 퍼블리 등 콘텐츠 서비스, 유료 앱 등 한 달에 유료 구독 서비스에 지불하는 비용이 꽤 된다. 소유의 방식이 구매에서 구독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상품 구독은 으리으리한 저택에 셋방살이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돈을 내는 동안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구독을 끊는 순간 빈손으로 방 빼야 하는 헛헛함을 각오해야 한다.

펠리시모 500색 색연필 301-320 FOREST 패키지 © 더 스크린

지난 6개월간 펠리시모의 색연필 덕에 ‘구독’의 쾌감을 재확인했다. 확실히 실물을 손에 쥐는 만족감은 다르다. 더불어 매달 배송 날짜를 기다리고, 어떤 컬러 키워드일지 설레며 포장을 뜯고, 점차 쌓여가는 색연필 박스에 흡족해한다.

만약 ‘판매’가 목적이라면 500자루를 한 번에 다 팔아도 된다. 맘에 드는 패키지만 골라서 살 수 있게 해도 된다. 내 돈을 내고 원하는 걸 얻는데 25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건 강력한 제약 조건이다. 그런데도 펠리시모가 구독 방식을 채택한 건 좋은 상품을 넘어 좋은 경험을 제공한다는 야심 혹은 자신감으로 읽힌다.

구독의 가치는 ‘이용’이 아닌 ‘연결’에 있다. 제공자와 구독자 사이, 이번과 다음 사이가 기대와 만족으로 연결될 때, 구독의 자부심이 생긴다. 헛헛한 디지털 시대의 허를 찌르는 구독 경험. 일본의 색연필 장인들에게 한 수 잘 배우고 있다.

펠리시모 500색 색연필 © 더 스크린

펠리시모의 500색 색연필 25개월 구독에서 또 하나 얻은 건 어떤 일의 끝을 보기까지 당연하게도 1년 혹은 2년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자각이다. 우리는 틀에 쉽게 익숙해진다. 당연하다는 듯 1년 365일 12개월의 틀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성과를 재촉한다. 매달 색연필 박스가 도착할 때마다, 1년보다 더 멀리를 그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때쯤엔 드로잉을 배워서 내가 그린 그림 한 두 점을 벽에 붙여두리라. 500색 색연필로 장식할 희고 너른 벽이 있는 사무실로 이사를 해야지. 색연필 구독처럼 <더 스크린>도 사람들에게 흐뭇한 경험이 주는 구독 서비스를 만들어야 할텐데. 조급할 거 없어. 아직 18개월이나 남았는걸? 25개월의 색다른 약속으로 시간 부자가 된 기분이 썩 좋다.

editor 박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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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