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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동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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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008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들, 맹렬하든 담담하든 그들의 사랑 고백을 듣는 일을 사랑합니다. 그저 듣기만 해도 내 안에서 ‘사랑한다’는 동사가 꿈틀거리죠. 그래서 인터뷰를 사랑합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나는 이들은 무언가를 ‘행한’ 사람들이고,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대상을 사랑하는 데서 나온다고 여깁니다. 종종 겉으로 드러나는 동력이 ‘분노’처럼 보여도 한 꺼풀 아래를 들여다보면 사랑이거든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당연히 모릅니다. 이 난해한 주제는 인류가 기록을 시작한 이래 철학과 과학의 연구 대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끊임없이 그 질문을 곱씹는 것이 인류의 숙명이겠죠. 그중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의 책 <사랑에 관한 연구>에서 발견한 구절을 메모해 두고 종종 꺼내 읽습니다.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대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유일한 시련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호세 오르테가 <사랑에 관한 연구>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 감정이 아닌 행동이라는 건 몸으로 겪어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생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두리뭉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답을 했는데, 솔직하게 답할 걸 후회했어요.

이십 대 후반, 영화 기자가 되겠다는 목표는 계속되는 거절과 실패에 치이고 꺾여 너덜너덜했습니다. 다른 분야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종종 영화 관련 기사를 썼지만 늘 목이 말랐어요. 6년 동안 내겐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다가 버럭 폭발했습니다. 안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영화로 세상에 말을 걸고 영화와 세상을 연결하는 일을 사랑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짝사랑도 하루 이틀이고 퇴짜도 한두 번이지, 나 싫다는데 관두자. 그러곤 영화를 피해 다녔습니다. 극장에도 발길을 끊고, 구독하던 잡지도 다 갖다버리고, 영화 좋아하는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죠.

그렇게 몇 달을 도망 다니던 어느 일요일, TV에서 주성치의 <식신>(1996)이 나오더군요. 차마 채널을 돌리지 못하고, 홀린 듯 그 앞에 앉았습니다. 모든 장면을 다 외울 만큼 본, 주성치의 어처구니없는 코미디를 보면서 눈물 콧물 쏟으며 엉엉 울었어요. 하도 울어서 골은 띵한데, 한 가지는 명료해지더군요. 나는 이 영화의 세계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어떻게든 저 세계로 가는 길을 찾자. 최소한 도망가지는 말자. 그러곤 얼마 뒤 영화 월간지 <스크린>에서 경력 기자 채용 공고를 봤고, 영화 기자가 됐습니다. 물론 그건 시작에 불과했고, 지금도 영화의 세계로 가는 길을 찾으며 삽니다.

1년 뒤 영화 기자로 <쿵푸허슬>(2005) 개봉에 맞춰 내한한 주성치 감독을 만났어요. 짧은 인터뷰 시간에 쫓겨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통역 선생님의 입을 빌려) 물었어요. “당신은 왜 영화를 사랑합니까?” 그는 아주 짧고 담담하게, 조금은 싸늘하게 답했습니다. “현실엔 해피엔딩이 없으니까요.”

모든 영화를 너무도 확고한, 우격다짐에 가까운 해피엔딩으로 만드는 감독의 냉소적인 답. 하지만 그가 영화의 세계로 들어온 험난한 여정을 알고 있어서 저는 믿어버렸습니다. 그래, 저건 사랑이지. 쌩하게 떠나는 뒤통수를 애틋하게 바라보면서요.

[살롱 드 스포금지] 94회에서 <GV 빌런 고태경>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정대건 작가 겸 감독과 만났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일에 조금 지친 영화 감독이 ‘GV 빌런’을 만나면서 사랑하는 것들을 되찾는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사랑 고백에 흠뻑 빠져 들었어요.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쉽지 않은 여정을 멈추지 않는 정대건 감독을 보며 제 안에서도 간질간질 꿈틀대는 사랑을 느낍니다. 마치 짠 것처럼 문자로 날아온 사랑 고백도 받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극장에서 <로마의 휴일>을 봤어요. 극장에서 옛 영화를 보면서,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같이 영화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자꾸만 사랑하는 것들이 사라져가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내가 눈과 귀를 닫고 멈춰 있을 확률이 높아요. 내일은 한 번 사랑하는 것들을 향해 움직여보시죠. 사랑은 동사니까요. 봄날이 가는 이때, 이 편지가 당신을 간지럽히면 좋겠습니다.

2020년 5월 21일

박혜은 편집장 드림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

환영합니다. 2019년 1월 문을 연 영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더 스크린>은 가치 있는 문화 생활을 원하는 여러에게 더 좋은 경험을 약속하는 ‘컨시어지 미디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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