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깨지지 않은, 반드시 깨질 기록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피아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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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권리를 빼앗긴 여성들에겐 예술이 목소리가 되어주었습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 이전엔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1993)가 있었습니다. 72년 칸영화제 역사 상 유일한 여성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셀린 시아마 감독이 오마주를 바친 작품 <피아노>를 다시 만나봅니다. 편집자 주


1993 CANNES 영화제 특집 – 황금종려상 공동수상작

<THE PIANO>와 캠피온의 작품세계 

<피아노>는 폭풍의 언덕과 같은 격정적인 사랑을 묘사하면서도, 유럽의 색채와는 전혀 다른 특유의 오스트레일리아 문화를 자연스럽게 부각시켰다. 

끊임없이 화제모은 정열과 로맨스로 가득찬 영화 

제46회 깐느영화제 수상결과가 발표되기 전부터 뉴질랜드에서 온 독특한 여인 제인 캠피온과 그녀의 작품, 정열과 로맨스로 가득찬 <피아노>는 끊임없이 화제를 모았었다. 

각종 매스컴은 <피아노>를 수시로 다루었고, 심지어 그것을 보지 못한 사람조차 가장 가능성있는 작품으로 꼽게 되었다.

캠피온과 영화 <피아노>가 이토록 주목을 받는 배경에는 최초로 여성감독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캠피온의 이전의 작품들, 보석처럼 떠올랐던 그녀의 최초의 단편 <나무껍질 Peel>(86), <스위티 Sweetie>(89) 그리고 <내 테이블의천사 An Angel at My Table>(90)의 충격적인 감동에 기인한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출생한 제인 캠피온은 지금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녀가 예술학교에 다니던 중 우연히도 무대에 관해 뭔가를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그녀는 무대에서 직접 관객과 맞부딪힌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소형영화를 출품하고자 했으며 그 때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대부분 영화에 파묻혀 지냈는데 70년대에 개봉된 거의 모든 영화들을 보았다. 캠피온이 특히 좋아했던 작품은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관례주종주의자>, 믹 재거와 니콜라스 로에그의 <퍼포먼스>, 안토니오니의 <직업 리포터>, 루이 브뉘엘, 켄 러셀, 마틴 스콜세지 등이다.

그녀가 직접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영화·방송 학교에 다니던 80년도 초기 무렵이었다. 그녀는 주로 단편영화를 만들었는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만 완전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대중적인 기호를 의식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녀의 ‘안티 히어로’에 대한 예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캠피온은 영화의 전형적인 주인공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 ‘영웅’이라는 존재는 헐리우드 영화에서처럼 단순하고 전형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현실적인 삶이란 훨씬 더 풍성하고 복잡하고 아무리 평범해보이는 개인일지라도 그 자신에게 포커스를 맞추기만 하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무궁무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대한 집요한 관심, 특히 인간의 잠재된 욕망에 대한 열정적인 추구는 캠피온 작품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테마이다.

표현주의풍, <스위티>와 <내 테이블의 천사>

새로운 시도를 즐겨하는 그녀는 독일 표현주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추함과 노쇠, 순진함에 가장 강하게 끌린다고 한다. 그녀는 인간의 진실, 특히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고 모든 종류의 어긋남을 좋아한다. 많은 영화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인간성의 살균을 끔찍하게 여긴다. 거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고 잘 차려입고 행복 하다는 식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다양성을 생각할 때 그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캠피온은 82년에 최초의 단편 <나무껍질>을 만들었고, 이 영화가 86년 깐느에서 단편 부분 황금종려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녀의 존재는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일련의 단편영화들 <냉담의 시기 Passionless Moments>(84), <어떤 소녀의 이야기 A Giris Own Story>(83), <시간이 흐른 후에 After Hours>(84) 그리고 TV 영화로 제작한 <두 친구들 Two Friends>(86)이 있다. 이 영화들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각종 국제영화제를 휩쓴 이례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캠피온이 만든 최초의 장편은 <스위티>이며, 한마디로 어떤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매우 기괴하면서도 노골적인, 아무튼 대단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허위의식에 가득찬 어른들의 비합리성을 발견함으로써 타락하게 |되는 어린이의 세계와 닮았다. 

벙어리 여인, 피아노, 대립과 사랑

첸 카이게의 <패왕별희>와 함께 93 깐느 황금종려상을 공동수상한 <피아노>는 캠피온의 세 번째 작품인 셈.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유럽의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에서 벌어진 대단히 로맨틱하면서도 오싹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대작 <폭풍의 언덕>과 같은 격정적인 사랑을 묘사하면서도, 유럽의 색채와는 전혀 다른 특유의 오스트레일리아 문화를 자연스럽게 부각시킨 점이 돋보였다.

스코틀랜드에 사는 말 못하는 에이다라는 여인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독백(마음의 소리)을 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에이다는 딸 프롤라와 함께 식민지 뉴질랜드로 향하고, 남편이 될 스튜어트는 자신이 벙어리 여자와 결혼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성불구자였다. 그는 뉴질랜드 개척자였는데, 에이다가 분신과 같이 여기는 피아노를 집으로 가져오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고립되어 있으며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스튜어트에게 피아노라는 물건 자체는 문명의 상징처럼 이질스럽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말 못하는 에이다의 온갖 감정표현을 대신해주던 피아노는 쓸쓸한 바닷가에 버려지게 된다. 얼마 후 피아노는 이웃에 살고 있는 베인즈라는 야성적인 청년이 차지하게 된다. 몸에 문신까지 하고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베인즈는 보다 뉴질랜드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에이다와 첫 대면에서 그녀의 아담하게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버린다. 

이에 베인즈는 그녀가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허락해 준 대신 검은 음반을 누를 때마다 그가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는 제의를 한다. 에이다와 베인즈의 관계가 에로틱하게 발전하면서 프롤라와 스튜어트의 감시는 시작된다. 에이다가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프롤라가 둘 사이의 비밀을 알아차리고 만다. 결국 둘의 관계를 눈치챈 스튜어트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날, 에이다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만다. 절규하는 에이다! 마침내 그녀는 딸 프롤라, 베인즈와 함께 스튜어트 곁을 떠나기로 한다. 

다소 진부한 듯한 소재를 강렬하면서도 짜임새있게 표현해낸 제인 캠피온의 연출 역량이 놀랍다는 평과 함께 말못하는 여인의 역할을 섬세하게 그려 낸 홀리 헌터에게도 깐느 여우주연상이 수여됨으로써 명연기를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스크린> 1993년 7월 호 | 글 · 구성 김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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