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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검은 식탁

살인의 추억의 짜장면부터 기생충의 짜파구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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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먹는 것이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영화에서도 음식은 단순한 소품을 넘어, 인물과 인물의 관계를 암시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기생충>의 ‘짜파구리’가 한국을 넘어 전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이유다. 4월 29일(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흑백판이 개봉했다. 흑백 영화로 보는 ‘검은 짜파구리’는 어떤 맛일까? 이참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 식탁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

김기영 감독의 <하녀>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처럼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클래식들은 흑백이 많습니다. 이렇게 흑백으로 하면 왠지 나도 클래식에 포함될 것 같은 즐거운 환상이 듭니다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

21세기의 클래식을 만들고 있는 봉준호 감독은 다음 세기에도 자신의 영화가 ‘클래식’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흑백판이 4월 29일(수) 개봉했다. “봉준호 감독과 홍준표 촬영 감독이 한 장면 씩 콘트라스트와 톤을 조정했다”는 <기생충> 흑백판은 색을 지운 자리에 음영의 깊이를 채웠다. 두 사람은 이전에도 함께 만든 <마더>를 흑백판으로 변환했던 경험이 있다. 빛과 그림자, 공간의 깊이가 더 도드라져서 확실히 컬러 영화와 다른 맛이다. 봉준호 감독 영화의 식탁을 흑백으로 보면, 그 또한 다른 맛이다.

editor 박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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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식탁, 짜파구리

<기생충>(2019)

컬러일 때나 흑백일 때나 짜파구리는 여전히 ‘검은 색’이지만, 흑백으로 보는 한우 채끝 등심 짜파구리는 훨씬 더 그로테스크하다. 봉준호 감독은 왜 짜파구리를 선택했을까? “원래 ‘너구리’를 좋아한다”는 그는 “연교(조여정)는 충숙(장혜진)에게 한우 채끝 등심을 넣은 짜파구리를 주문하는데, 부자들은 똑같은 라면을 먹더라도 뭔가 하나를 더할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기생충>(2019)에서 봉준호 감독이 보여준 건 더 은밀하고 견고한 현대의 계급사회다.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박 사장 가족의 ‘하인’이 아니다. 그들은 선을 넘지만 않으면 별탈 없는, 고용 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족이 ‘동등하다’고 여기는 관객은 아무도 없다.

한우 채끝 등심 짜파게티는 값이 다른 평등, 은밀한 계급을 한 눈에 보여주는 상징이다. 라면은 대표적인 저렴한 간편식이다. 부자인 박 사장 식구들도 라면을 먹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라면은 주식이 아닌 간식이고, 라면 값의 열 배가 넘는 한우 토핑을 얹어 먹는 특식이다. 기택의 가족도 짜파구리를 먹을 수 있지만, 한우 토핑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토핑으로 얹어진, 넘을 수 없는 계급의 벽, 그 씁쓸한 맛을 봉준호 감독은 한우 채끝 짜파게티 한 그릇으로 대접한다.

<옥자>의 식탁, 채식 한 상

<옥자>(2017)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봉준호 감독은 현대 사회의 대규모 축산 산업의 문제를 <옥자>에 담았다. <옥자>(2017)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직접 칠레의 초대형 돼지고기 도축 및 포장 공장을 견학한 봉준호 감독은 “굉장히 현대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위생적인 대형 공장이지만, 다녀온 뒤로 돼지고기를 먹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옥자>는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와 슈퍼 돼지 옥자의 모험담이자, 돈만 되면 뭐든지 하는 글로벌 대기업의 탐욕을 고발하는 사회파 영화이기도 하다. 생명 공학 기술로 ‘육즙이 풍부하고, 욕 나올 만큼 맛있는 슈퍼돼지’를 찾았다던 글로벌 대기업이 실은 비윤리적 동물 생체 실험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장면. 강제 교배와 생체 테스트, 그리고 거대한 농장을 가득 채운, 끝도 없이 줄을 선 슈퍼 돼지들을 도살하는 시스템을 보고나면, 깔끔하게 포장되어 대형 마트 진열대에 올라 있는 고기 덩어리가 확실히 다르게 보인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출발해 옥자 찾아 전세계를 달린 미자는 거대한 좌절 그리고 작은 구원을 이루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미자를 졸졸 따라와 동그란 궁뎅이를 돌려 앉은 작은 생명체 옆에서 미자와 할아버지는 신선한 야채로 건강한 상을 차린다. 미자의 채식 식탁은 작은 실천이다. 개인이 거대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그러나 삶에서 작은 실천마저 포기해선 안된다.

<설국열차>의 식탁, 프로틴 바

<설국열차>(2013)

봉준호 감독의 첫 SF 영화 <설국열차>는 장 마크 로셰트와 자크 로브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로 옮긴 작품. 이상 기후로 지구가 빙하기에 접어들고, 절대 멈추지 않는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만 살아남는다. 머리 칸은 부유한 자, 꼬리 칸은 가난한 자의 영역이다. 수평의 계급사회에 대한 봉준호 감독의 고민은 <설국열차>부터 구체화됐다.

<설국열차>에선 음식이 곧 계급이다. 꼬리 칸의 가난한 자들은 배급되는 ‘영양 만점(?)’ 프로틴 바를 주식으로 삼는데, 양갱을 닮은 이 검은 음식의 정체는 식욕을 뚝 떨어뜨린다. 이 정체 불명의 검은 프로틴 바는 머리 칸의 부자들이 먹는 화려한 색깔의 신선한 생선 초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못 먹을 것을 ‘먹을 만하게’ 만들어 팔면서 생색내는 머리 칸 부자들의 뻔뻔함은 현실에서도 별로 낯설지 않다.

열차의 견고한 계급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머리 칸 부자 권력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메이슨(틸다 스윈튼)를 인질로 잡아 프로틴 바를 먹인다. <설국열차>의 프로틴 바는 생존의 맛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 실제로 이 검은 바를 먹어볼 일은 없겠지만, 어떤 맛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마더>의 식탁, 닭 백숙

<마더>(2009)

‘엄마’라는 이름이 가진 신화를 봉준호 식으로 비틀어 보여주는 스릴러 <마더>. 자식을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한다, 는 말은 과연 사랑일까 광기일까. 대배우 김혜자는 형형한 눈동자로 ‘모성의 광기’ 눈물처럼 뚝뚝 떨구며 영화를 집어 삼킨다.

<마더>의 엄마(김혜자)는 ‘먹이는 존재’다. 그는 어린 시절 어떤 사건 이후, 총기를 잃은 아들 도진(원빈)을 알뜰살뜰하게도 먹인다. 아니 안절부절하며 먹인다. 몸은 이미 어른이지만, 영혼은 엄마가 건네 준 ‘약 탄 박카스’를 마셨던 그때에 머물러 있는 아들을 엄마는 ‘축복’이라 부르면서도 ‘업보’로 지고 산다.

<마더>의 식탁에 오른 메뉴는 닭 백숙이다. 소시민들의 보편적인 보양식. 엄마는 자기는 먹는 둥 마는 둥, 정성스레 뼈를 발라 아들 입에 넣는다. 닭의 형태를 그대로 삶아 낸 닭 백숙은 보기에 따라 꽤 기괴하다. 희고 부둥부둥한 닭의 몸통은 해체되어 도진의 입에 들어가고, 식탁엔 닭뼈만 쌓여 있다. 아주 익숙한 모습인데 약간만 떨어져서 보면 좀 끔찍하다. <마더>가 발가벗긴 모성 신화도 그렇다.

<괴물>의 식탁, 밥과 반찬

<괴물>(2006)

봉준호 감독은 <괴물>(2006)에서 대낮의 서울 한강공원 한복판에 괴물을 던져 놓는다. 봉준호 감독의 세 번째 영화이자 첫 천만 영화 <괴물>은 시침 뚝 떼고 현실에 판타지를 뒤섞어버리는 봉준호 감독의 특기가 본격적으로 발현된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 때문에 돌연변이로 거대해진 동물이 등장한다는 점에 <옥자>와 짝으로 묶일 영화다. <괴물>에선 (표면상으론) 가해자인 괴물에 맞서 주인공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옥자>에선 (몸집은 거대하지만) 피해자인 옥자를 지키기 위해 미자(안서현)가 싸운다. 이렇게 보면 <괴물>과 <옥자>는 한 쌍의 데칼코마니같다.

마지막 장면도 <괴물>과 <옥자>는 꼭 닮았다. 강두(송강호)는 모든 난리통을 끝내고, 다시 한강의 작은 매점으로 돌아온다. 일상을 되찾는 과정에서 그는 아버지(변희봉)와 하나뿐인 딸 현서(고아성)를 잃었다.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건 현서가 구해 온 소년이다. 강두는 밥을 차린다. 대단할 건 없지만, 따끈한 밥도 짓고 반찬도 여럿이다.

<괴물>의 식탁은 강두의 각성이다. 현서가 살아있을 때, 컵라면 하나를 제대로 못 끓여서 야무진 딸에게 구박을 받았던 그다. 강두는 많은 것을 잃고 나서야,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 지 깨닫는다. 이상한 소음이 들려오자 강두의 눈이 경계태세를 갖춘다. 그는 이제 절대, 사랑하는 것들을 잃지 않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의 식탁, 짜장면

<살인의 추억>(2003)

돌이켜보니 봉준호 감독의 ‘짜장면’ 사랑은 그의 두 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부터 시작됐다. 짜장면은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사건을 만나 진퇴양난에 빠져버린 소시민 형사들의 주식이다. 무고한 목격자 백광호(박노식)를 잡아놓고 구타하는 심문실 명장면에서도 짜장면과 함께였다.

<살인의 추억>의 식탁은 상징적인 메시지보다 인물의 관계를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봉준호 식 코미디다. 낮이나 밤이나 함께 ‘밥 먹는 사이’(식구)가 됐지만 박두만(송강호)은 서울에서 내려온 엘리트 형사 서태윤(김상경)이 영 마뜩찮고, 범인 검거의 진도는 안나가고, 수사보다 신문 인터뷰가 더 중요한 구 반장(변희봉)의 닥달은 심해진다. 이 불편한 타이밍에 마치 좌천을 예언하듯 ‘삑사리’로 부러지는 나무 젓가락이 봉준호 감독의 ‘삑사리’ 코미디의 화룡정점.

editor 박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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