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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물구나무서기에 걸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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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편지 #006

물구나무서 보신 적 있나요? 1~2분 만에 전신 혈액 순환이 되고, 아래로 쏠려있던 내장 기관이 제자리를 찾고, 신진대사가 활성화된다는 궁극의 맨손 운동으로 유명합니다. 별다른 기구도 필요 없고, 넓지 않은 공간에 매트 하나만 있으면 준비 끝. 아주 간단한 운동입니다.

그럼 물구나무서기를 완전히 익히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물구나무서는 법’을 검색합니다. ‘영상 하나로 물구나무서기 끝내기’ ‘7일 만에 물구나무서는 법’ ‘물구나무서기 2주 훈련법’ 같은 제목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을 것 같죠. 그러나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가 내놓은 답은 예상 밖입니다.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해야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다.”

제프 베조스는 세계 최고의 갑부이자, 세계에서 가장 편지를 잘 쓰는 사람 중 하나일 겁니다. 그는 1997년부터 매년 아마존의 주주들에게 편지를 써왔는데, 실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부치는 거나 마찬가지죠. 아마존의 사업 원칙과 목표,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비전을 담은 ‘베조스의 편지’를 모은 책도 출간됐습니다. 물구나무서기에 관한 이야기는 2017년 편지에 적혀 있습니다.

‘완벽하게 혼자 하는 물구나무서기’를 배우기로 마음먹은 베조스의 친구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요가 클래스도 다니고, 한동안 연습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아서 물구나무 서기 전문 강사를 찾아갔답니다. 그리고 첫 수업에서 훌륭한 조언을 들었죠.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면 2주 안에 물구나무서기를 마스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6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해야 물구나무를 설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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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업가인 제프 베조스는 이 이야기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선 높은 기준이 필요하고, 높은 기준을 세우려면 그에 따른 현실적 시간과 노력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최소 6개월 걸리는 물구나무서기를 2주 만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중간에 포기하고 말겠죠. 높은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이 당연한 소리가 제겐 또 같고도 다른 의미로 들렸습니다.

볼 것과 읽을 것이 넘쳐나고 시간은 부족한 시대, 요약이 정석이 됐습니다. 심지어 요약의 요약의 요약본도 유행이죠. 두 시간짜리 영화를 10분으로 요약한 영상, 그걸 또 3분으로 압축한 영상으로 영화를 ‘대신’ 봅니다. 250 페이지 책을 25장 분량으로 핵심 정리한 콘텐츠, 혹은 5분 만에 요약해주는 영상으로 책을 ‘대신’ 읽습니다. 16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30분 안에 요약하는 천의무봉 편집력엔 탄복하고 맙니다. 요약본엔 줄거리, 명장면, 명대사, 메시지까지 빠짐없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약본으로 본 그 영화와 드라마, 책을 보고 읽은 게 맞나요?

요약본만 보고 “다 봤다”고 믿는 건, 주차장에 앉아 내비게이션 모의 주행 모드를 보고선 “그 길을 다녀왔다”고 생각하거나, 남이 풀어주는 문제 풀이를 보면서 “그 문제를 풀어봤다”고 자신만만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움은 되겠지만, 그뿐이죠.

영화가 100명의 관객을 만나면, 100편의 영화가 된다고들 합니다. 100% 동감합니다. 침묵과 풍경, 여백과 행간에서 내게만 보이고 읽히는 ‘번쩍하는 순간’과 맞닥뜨리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곱씹을 때, 그 영화, 드라마, 책은 ‘완벽한 내 것’이 됩니다. 요약본이 ‘불필요하다’고 스킵해버린 그 장면과 문장들 말입니다.

완벽한 물구나무서기를 습득하는 데 (매일 연습해서) 6개월, 밥 한 그릇 먹고 소화하는 데 5시간 정도 걸립니다. 책과 영화, 드라마도 음미하고, 되새기고, 내 것으로 만들려면 당연하게도 ‘현실적인 시간’이 필요하죠.

4월 30일(목) 석가탄신일부터 5월 5일(화) 어린이날까지, 2020년 첫 황금연휴가 시작됐습니다.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나들이 황금기예요. 어디로든 떠나고 싶지만, 더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저도 마지막 물리적 거리두기를 지킬 생각입니다. <더 스크린>에 연휴 동안 함께 보고, 읽고, 경험할 거리를 챙겨두었습니다. 책인가 무기인가 겁내지말고 읽어봐요, 두꺼운 책, 재미있다곤 들었지만 엄두가 안 났던 정주행 시리즈, 돌아온 클래식 <패왕별희>, 요상하게 식욕 당기는 봉준호 감독의 식탁 그리고 좋은 것들만 모아 보내는 프라이빗 서비스 ‘라이크 키트 LIKE KIT’까지. 자, 시간은 충분합니다. 진짜 내 것을 무럭무럭 쌓는 뿌듯한 연휴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2020년 4월 29일

박혜은 편집장 드림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

환영합니다. 2019년 1월 문을 연 영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더 스크린>은 가치 있는 문화 생활을 원하는 여러에게 더 좋은 경험을 약속하는 ‘컨시어지 미디어’입니다.

여러분이 귀한 시간을 들여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할 ‘멋진 문화 콘텐츠’와 1984년 창간해 26년 간 천만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전문 월간지 <스크린>의 독점 아카이빙 콘텐츠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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