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셀린 시아마의, 불꽃 같은 여인들의 자화상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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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은 한 편의 예술 작품이면서, 그것을 빚은 창조자의 이미지이며, 그가 자신에 대해 느끼고 상상하고 믿었던 것이 무엇이며, 그 가운데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진실의 요체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언제나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들은 왜 자화상을 그릴까? 이 질문에 답을 들려주는 책 <자화상의 비밀>(아트북스, 2018)에서 저자 로라 커밍은 ‘자화상’을 위와 같이 정의한다. 화가의 상상과 믿음, 선택의 결과로 탄생한 예술 작품. 로라 커밍의 분석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긴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결혼 초상화’를 의뢰받은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와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를 주인공으로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강렬한 첫인상은 이제껏 보기 드물었던 ‘동등한 자들의 러브스토리’일 것이다. 우아하고 격정적인, 사랑과 이별. 그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셀린 시아마 감독이 마치 유화를 그리듯, 수많은 은유와 상징으로 겹겹히 색을 더해 이 작품을 그려냈다는 걸 알 수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기록에 남지 못한 온 여인들의 삶에 관한 기록이며, 예술사가 지위를 허락치 않았던 여성 예술가들의 복원이고, 여성의 목소리를 외면해 온 세상을 향한 타오르는 외침이다. 동시에 예술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자화상이다. 시아마 감독은 수천 년 동안 구전으로 떠돌던 신화의 재해석부터 18세기의 결혼 제도와 풍속을 물감 삼아, 21세기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피사체’이길 강요하는 세상에 걸작으로 남을 자화상을 내놓았다. 


목차

결혼 초상화를 벗어나 밤의 광야로
뮤즈 아닌 예술가
후회하지 말고 기억할 것
셀린 시아마의 자화상


 

 

 

결혼 초상화를 벗어나 밤의 광야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마리안느는 자부심이 강한 프로페셔널 화가다. 그는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미술계의 틈바구니에서 여성 화가에겐 금지된 남성 누드화를 몰래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내면서, 경력을 이어왔다. 온갖 난관을 겪었을 것이다. 조각배가 요동치는 통에 캔버스가 바다로 떨어졌을 때, 망설이지 않고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델의 도움 없이도 ‘결혼 초상화’ 쯤은 충분히 완성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산책 친구인 척 동행하며 엘로이즈를 훔쳐보는 중에도, 이미 그가 그릴 결혼 초상화의 윤곽은 잡혀있었다. 정면을 부드럽게 바라보는 다정한 눈, 수줍은 듯 붉은 뺨, 희고 빛나는 피부, 단정한 입매, 다소곳하게 모은 손. 결혼 초상화의 관습은 확고하다. 이 초상화에 돈을 지불할 여인의 부모와 초상화를 소유할 청혼자를 만족시킬 그림을 완성할 것. 프로페셔널 화가가 지켜야 할 룰이다.    

화가라는 정체를 밝히고, 엘로이즈에게 완성된 초상화를 보여줄 때만 해도 마리안느의 얼굴엔 자부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그 자부심을 박살 낸다.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네요.” 당황한 마음에 “당신이 비평가라도 되느냐, 그림에는 관습과 규칙이라는 게 있다”라고 항변하지만, 자신이 그린 모델 본인에게 들은 혹평은 뼈아프다. 묘사도 엉망이고, 해석도 없다니! 

그때 마리안느는 그냥 백작 부인(발레리아 골리노)에게 초상화 값을 받고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초상의 얼굴을 지워버린다. 그 그림을 화가로서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남성 화가들이 여성을 밀어내며 운운하던 “관습과 규칙”이란 ‘배제의 언어’를 자기 방어용으로 내뱉은 것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마리안느는 5일 안에 엘로이즈의 초상을 다시 그리기로 한다. 

두 번째 초상화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 발주자가 달라졌으므로. 두 번째 초상화의 실질적 발주자는 엘로이즈로, 이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만족시켜야 한다. 엘로이즈가 자신을 어떻게 세상에 드러내길 원하는지 – 초상화의 존재 이유는 이것 뿐이다. 셀카의 존재 이유가 그러하듯 – 알아채야만 두 번째 초상화를 완성할 수 있다. 바라보고 포착하는 것이 직업인 마리안느는 아직도 조금 우쭐해 하며 엘로이즈에게 ‘내가 발견한 당신’을 줄줄 읊어준다. 조용히 듣던 엘로이즈가 비밀을 알려준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이 순간, 화가로서 시선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믿었던 마리안느의 또 다른 자부심도 박살 난다. 대신 마리안느는 그가 지금까지 ‘화가’로서 딛고 서 있었던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초상화는 점점 더 엘로이즈를 닮아가고, 초상화가 완성될수록 두 사람의 이별도 다가온다. 화가 마리안느가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을 아는 것처럼, 먼저 사랑을 시작한 엘로이즈는 ‘헤어져야 하는 때’를 안다. 

이별은 고통스럽지만, 헤어진다고 사랑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별은 ‘새드 엔딩’이라는 러브스토리의 공식마저 깨버린다. 이제 마리안느는 ‘빤한 관습적 초상화’ 따위는 그리지 않을 것이고, 엘로이즈는 결혼을 피하고자 비명마저 삼킨 채 죽은 언니처럼은 죽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후회하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기로’ 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그 결과가 영화의 문을 여는 그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마리안느가 소피(루아나 바야미)와 엘로이즈와 함께 밤의 축제에 간 날, 달이 지배하는 ‘일루션’의 시간, 타오르는 모닥불과 여인들의 합창 그리고 치맛단에 불이 붙은 채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웃던 엘로이즈. 마리안느는 그날 밤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 마리안느는 얼굴을 그리지 않은 이 작품을 직접 ‘초상’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초상에서 엘로이즈의 얼굴을 볼 순 없지만, 그녀가 발 딛고 선 현실, 타오르기 시작한 내면의 불꽃, 그의 시선이 향한 이상향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여인의 얼굴이 아닌 여인의 세계를 담은 초상화. 영화의 제목과 같은 이 작품은 결혼 초상화에 박제될 뻔한 엘로이즈가 밤의 광야에 서는 과정이자, 화가 마리안느가 이제 여인의 세계를 그려내는 예술가라는 선언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 전체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초상’이 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영화를 사랑하며 내 인생을 보냈다.” 72회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 후 ‘르 몽드’와 인터뷰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만든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는 폭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통해 더 이상 자신을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는 영화’를 사랑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여성으로서, 퀴어로서, 예술가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겠노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뮤즈가 아닌 예술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셀린 시아마 감독이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을 선택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여성 예술가는 항상 존재해왔고, 예술이 번창하는 18세기 중반에는 여성 화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여성은 화가가 아닌 모델로 존재했고, 뮤즈라고 불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중심 메시지는 그 어디에도 뮤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셀린 시아마 감독은 다양한 여성 화가들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길고, 작고, 둥글고, 뾰족하고, 윤곽이 뚜렷한 각기 다른 여성들의 얼굴로 오프닝 시퀀스가 채워진다. 그녀들은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이 오프닝의 놀라운 점은, 몰입하고 있는 – 그것도 모두 예술가인- 여성들의 얼굴을 이렇게 보는 것 자체가 관객에게 굉장히 낯선 경험이라는 깨달음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남성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의도적으로 남성을 배제했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영화가 남성에 의해 배제당한 여성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서 남성을 볼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적합하다. 여성 화가가 가르치는 화실에 남성 학생이 없고, 고립되다시피 한 작은 섬의 낡은 저택에서 백작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건 매우 현실적인지 않나. 그보다는 영화 속 여성들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적 활동을 한다는 점이 훨씬 의도적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모든 여성은 이미 예술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직업이 화가인 마리안느는 아버지를 따라 예술의 도시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지내며 문화적 혜택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귀족인 엘로이즈보다 더 많은 문화적 경험을 누렸고, 직접 악기를 다룰 줄도 안다. 엘로이즈에게 수녀원은 일종의 수용소였겠지만, 그는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듣고, 책도 읽을 수 있”어서 괜찮았다고 떠올린다. 하녀 소피는 꽃을 보며 자수를 놓는 게 취미이고 신화에 관해 토론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밤의 축제에 모여든 여인들은 화음을 맞춰 합창한다(그것도 라틴어로). 

백작 부인이 첫째 딸을 잃고도, 기어코 엘로이즈를 이탈리아 밀라노의 귀족과 결혼시키려는 이유도 밀라노가 자유와 예술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백작 부인은 이 결혼만이 그녀들을 20년간 가둬두었던 작고 지루한 섬을 떠나,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한 이탈리아로 딸(과 자신)을 탈출시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화가라는 위상을 얻기 위해 ‘초상화의 관습과 규칙’을 지켜 온 마리안느처럼, 백작 부인도 귀족 여성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결혼의 룰에 따랐다.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와 결혼해야 하는 딸의 ‘분노’를 누구보다 잘 알지만, 백작 부인은 결혼이라는 룰을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미술을 배우는 젊은 여성 화가들의 얼굴로 시작해 이탈리아의 대형 공연장에서 비발디의 ‘사계’ 관현악 연주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엘로이즈의 얼굴로 문을 닫기까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예술의 영역 밖으로 밀려났던 여성들의 지위를 복원하겠다는 감독의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복원의 출발은 기록이다. 기록해 둔 것이 없다면 복원할 것도 없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예술가가 ‘기록을 남기는 자’임을 잊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들도 남겨져야 할 권리가 있다. 그런 이유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소피가 임신 중단을 위해 갖은 애를 쓰는 과정을 마치 풍속화를 그리듯 꼼꼼히 담아낸다. 소피는 모래밭을 뛰고, 비탈을 구르고, 아마도 약한 독성이 있을 정체 모를 풀을 달여 먹고 기절했다가, 결국은 (아마도 산파일) 노파에게 시술을 받는다. 시중에 떠도는 임신 중단 비법이란, 300여 년의 시간차와 문화권 차이가 무색할 만큼 조금도 다를 게 없어서 씁쓸한 실소가 터진다. 

함께 간 마리안느는 그 고통스러운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에게 ‘지켜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마리안느가 그 과정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도록 돕는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별다른 설명을 하진 않지만, 영화 밖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린다. “기록하지 않으면 지워지고 사라지고 잊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니 예술가여, 눈을 똑바로 뜨고 네가 목격한 것을 그려라, 남겨라.” 화가 마리안느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자아를 투영한 페르소나라면, 엘로이즈는 지금까지 함께 영화를 만들며 감독을 일깨워 준 배우와 동료들인 셈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셀린 시아마의 각성도, 영화도 없었을 거라는 존경심이 엘로이즈에게 배어있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할 것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양발은 이처럼 ‘현실’에 굳게 뿌리내리고 있는 한편, 영화의 시선은 저 높은 이상의 세계, 신화를 향하고 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온갖 불멸의 사랑이 우글대는 신화 중에서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가져온 건 절묘한 선택이자, 탁월한 비유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자, 오르페우스는 심금을 울리는 리라 연주와 노래로 저승의 왕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를 감동시켜 아내를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데스의 경고는 딱 하나,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뒤따라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지상을 코앞에 두고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저승으로 돌아간다. 이 신화를 처음 듣는 소피가 “말도 안 된다”라고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겨우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지키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사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는 죽음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한 사랑, 그 비극을 되새김하는 것이 목적이다. 오르페우스가 저승으로 가는 길이 눈물겹게 험난할수록, 금기는 깃털처럼 가벼울 수록, 죽음을 되돌릴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더 가혹하고 허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가 이 신화를 가져온 이유는 사뭇 다르다. 일단 오르페우스가 마리안느처럼 예술가라는 점, 에우리디케의 ‘죽음’과 엘로이즈의 ‘결혼’의 의미, 마지막으로 이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다. 죽은 아내를 살리겠다고 노래를 부르며 저승으로 떠나는 무모한 용기는 예술가의 기질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엘로이즈는 왜 에우리디케인가. 18세기뿐 아니라, 오랫동안 여성들의 생존은 혼사에 달려있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결혼은 직접적으로나 은유적으로 ‘죽음’을 의미한다. 엘로이즈의 언니는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엘로이즈는 ‘미안하다’는 편지와 함께 언니가 넘긴 ‘죽음(결혼)’을 이어받았다. 엘로이즈의 흰 웨딩드레스는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더 어울린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20

또한 신화에서 죽음은 완전한 무가 아니라, ‘저승’이라는 나름의 룰을 가진 또 다른 세계로 거처를 옮긴다는 묘사도 결혼과 딱 맞아떨어진다. 저승의 왕비 페르세포네조차도 그를 제멋대로 흠모한 하데스가 저승으로 납치해 온 것이다. 지상 세계와 모든 연이 끊긴 채 한번 발을 들이면 돌아올 수 없는 어둠의 세계. 이쯤이면 신화 속 저승은 마치 ‘결혼’을 비유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처럼 보일 지경이다. 언니처럼 육체적 죽음이 아닌 ‘신화적 죽음’을 선택한 엘로이즈는 이미 죽음(결혼)이 예정된 상황에서 마리안느를 사랑하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엘로이즈는 자신이 ‘예술가’를 사랑했음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끝내 아내를 저승에 두고 온 오르페우스가 부른 사랑 노래가 신화가 되어 수천 년간 기억된 것처럼,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작품으로 그들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 믿었다. 엘로이즈에겐 이미 28페이지의 그림과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있다. 이 정도라면 잊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엘로이즈는 저승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통해 사랑의 끝은 이별이 아닌 ‘잊힘’이라고 정의한다. 잊지 않으면 끝이 아니다. 그리하여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현실적인 동시에 신화적이고, 마리안느의 그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셀린 시아마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남아 영원한 생을 얻었다.    

 

 

 

셀린 시아마의 자화상

72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 셀린 시아마 감독 ©칸영화제공식홈페이지

“자화상은 화가를 작품으로써 현존케 한다. 그것이 내는 소리는 매우 간결하고 명확하다. 단, 그들이 말할 때는 거울에서 돌아보고 있는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있을 때, 혹은 홀로 남겨질 때 얼마나 고독한지, 그리는 것 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한 물음이 있을 때뿐이다.” 

앞서 소개한 책 <자화상의 비밀>에서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를 분석한 구절은 셀린 시아마 감독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연출 의도에 관해 말한 인터뷰와 놀랍도록 닮았다. 데뷔작 <워터 릴리스>(2007)를 시작으로 <톰보이>(2011), <걸 후드>(2014)에 이르는 ‘성장 3부작’은 셀린 시아마가 그려낸 ‘소녀들의 초상’이라 부를 수 있다. 10대 여성의 성 정체성 찾기와 성장을 아주 가까이서, 혹은 멀찍이 떨어져 다양한 각도로 그린 이 작품들을 거쳐, 셀린 시아마 감독은 18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첫 시대극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통해 예술가로서 자신의 질문을 빼곡하게 담은 첫 자화상을 완성한다.  

18세기 여성들의 사랑과 우정, 기억을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21세기의 한국 관객과 이토록 공명한 까닭, 72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상의 지지가 쏟아진 것도 자화상만이 뿜어내는 생기와 에너지 덕분이 아닐까 추측한다. 

“자화상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미술관을 걷다 보면, 그림이 가득한 벽에서 마치 그간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자화상은 유독 우리를 주시한다. 자화상을 마주하면 그를 알아볼 때의 전율이 있다. 그것은 마치 내 모습의 반영체를 우연이 마주할 때와 비슷하다. 이것이 바로 자화상 특유의 시선이다. 자화상의 시선은 매우 강렬하여,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독 나를 찾아내려고 하는 듯하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처럼. 자화상은 바로 그 사람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붓 대신 카메라를 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자화상을 통해 거울을 들여다보듯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의 향한 감독의 물음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한없이 이 사랑을 반복해서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삶에서 기억해야 하는 그 얼굴들을 잊지 않기 위해.

editor 박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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