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버스터의 숨은 1인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오리지널 전시: 영원이 된 기억,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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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버스터 (art+blockbuster의 조합어) [명사] 흥행에 성공한 예술 영화.

아직 2020년 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올해 최고의 아트버스터는 이 영화가 아닐까. 한국에서만 14만 명 넘는 관객의 사랑을 받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이야기다. 이 뜨거운 호응에 보답하는 특별한 전시도 열렸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오리지널 전시 : 영원이 된 기억’에서는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원화 7점과 디지털 인쇄본 2점, 전 세계 최초로 공개된 주인공들의 드레스 및 소품까지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애초에 3월 한 달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쏟아지는 뜨거운 반응에 두 번 일정을 연장해 4월 14일(화)까지 전시를 이어간다.

아트버스터 명작답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그림 한 점, 소품 하나에는 깊이 읽을 만한 이야기와 메시지가 담겨있다. 전시 작품 소개를 중심으로 영화 해설을 더한 아트버스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숨은 1인치. 아는 만큼 더 큰 감동이 보인다.

editor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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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초상화

엘렌 델마르 (Hélène Delmaire)작품, 나무 프레임 캔버스에 숯, 캔버스에 유화. 원화 전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총 세 점의 초상화가 등장하는데 그 중 첫 번째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의뢰를 받고 그린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다. 캔버스에 그려진 엘로이즈는 기술적으로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다. 동시에 어디선가 본듯한 귀족 아가씨의 전형적인 초상화다. 이 초상화엔 규칙과 관습은 있지만, 모델의 생기와 존재감은 지워져있다. 엘로이즈와 닮았지만 엘로이즈는 아닌 이 초상화에는 분명 ‘오류’가 있다.

이 초상화는 모델 없이 그려졌다.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은 화가 마리안느는 모델이 되기 거부하는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하며 초상화를 완성한다. 완성된 초상화 앞에 선 엘로이즈는 모델의 정체성을 담지도 못하고 화가의 개성조차 드러나지 않은 빤한 초상화라며 날카롭게 평가한다.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네요.

비밀스러운 관찰로 수집한 이미지 파편들, 그 파편을 규칙과 관습에 끼워 맞춘 초상화, 초상화와 모델 그리고 모델과 화가. 어느 하나 연결되지 못한 이 첫 번째 초상화에 담긴 키워드는 ‘분절’이다.

두 번째 초상화

엘렌 델마르 (Hélène Delmaire) 작, 나무 프레임 캔버스에 유화, 원화 전시

첫 번째 초상화보다 미소는 옅어졌지만 고집스러운 입매와 힘 있는 눈빛. 두 번째 초상화 속 엘로이즈는 가장 자기다운 표정과 포즈를 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두 번째 초상화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모델과 화가로서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린 초상화이기도 하다.

“다 알아요. 동요할 때 손동작을 보면요. 당황스러울 때는 입술을 깨물죠. 짜증이 날 때는 눈을 뜨고 있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가 말했다. 그런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가 답한다.
“할 말 없을 때 당신은 이마를 만져요. 평정심을 잃으면 눈썹을 올리죠. 당황할 때는 입으로 숨 쉬고.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영화는 이 초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통해 두 여성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낼 때, 동등하게 서로를 바라볼 때 비로소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를 웃게 한다는 걸, 또한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보여준다. 엘로이즈의 존재감과 생기가 표현된 두 번째 초상화의 키워드는 ‘동등한 시선’이다. 

이번 건 맘에 들어요. 날 잘 알게 됐으니까요.

엘로이즈와 아이 초상화

엘렌 델마르 (Hélène Delmaire) 작, 나무 프레임 캔버스에 유화, 니스 칠 마감, 원화 전시

마지막 초상화는 이전 두 작품과 다르게 마리안느가 아닌 다른 화가가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마리안느와 그녀의 손을 수줍게 잡고 앞을 바라보는 아이.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만 유일하게 정면을 쏘아보는 눈과 단단한 입매는 변치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마리안느는 한 미술 전시회에서 엘로이즈의 초상화와 마주한다. 그녀와 함께 있는 아이를 낯설게 바라보는 것도 잠시, 한 곳으로 시선이 뺏긴다. 엘로이즈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28페이지. 그걸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눈은 커졌다가, 눈물이 고였다가, 웃음 짓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인 엘로이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시간이 흘러 엘로이즈는 예정대로 결혼하고, 마리안느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는 화가가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엘로이즈의 손가락 끝의 28페이지는 말해준다. 그 사랑을 기억한다고, 그 사랑을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마지막 세 번째 초상화의 키워드는 그렇게 ‘기억’이 된다.

p.28 마리안느의 자화상

엘렌 델마르 (Hélène Delmaire) 작, 28p 마리안느의 자화상 드로잉, 디지털 프린트 전시

처음으로 엘로이즈가 모델이 아닌 그림이다. 정식으로 캔버스에 그린 것도 아니다. 마리안느가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며, 어떤 책 28페이지의 여백을 채운 그림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연이 가득한 이 그림에는 함께했던 이 시간을 잊지 말자는 한 연인의 약속이 담겨있다.

결혼 초상화가 완성되고, 침대에 함께 누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앞으로 다가올 이별 이후의 날들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한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보고 싶을 때 볼 그림이 없다며 마리안느의 ‘지금 모습’이 담긴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한다. 그 말에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읽던 책을 가져와 펼친다. 거울을 세워놓고, 지금 엘로이즈의 눈에 담겨있을 자신의 모습을 그려간다.

마리안느가 자화상을 그린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서기 8년 로마의 작가 오비디우스의 서사시 모음집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근간이 된 작품으로 신화와 전설을 담고 있다. 또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가 담긴 책이기도 하다. 마리안느가 자화상을 그린 28페이지에는 아프로디테의 연인이자,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미소년 아도니스의 신화가 적혀 있다. 작가 오비디우스는 “어울리는 결혼을 원한다면, 대등한 사람과 하라”는 말을 남겼는데, 셀린 시아마 감독은 영화 속 책 한 권으로 치밀한 복선을 깔아둔 셈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엘렌 델마르 (Hélène Delmaire) 작, 니스 칠한 나무에 유화, 디지털 프린트 전시

원화 손상 위험 때문에 이번 전시에서는 디지털 프린트본으로 전시됐다. 구름으로 가득한 밤하늘, 달빛 아래 홀로 광야에 선 여인의 치맛단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기묘한 그림. 영화의 문을 여는 것도 이 그림이다. 또한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 그림이 탄생하기까지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야시장.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든 여인들의 아카펠라가 격앙되는 사이 엘로이즈의 치맛단에 불꽃이 옮겨붙는다. 마음에서 피어난 불꽃이, 몸으로 옮겨붙은 것처럼.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바라본다. 불을 보고서도 놀라지도, 끄려고 하지도 않는다. 마리안느의 눈에 담긴, 엘로이즈의 불꽃은 시간이 지나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술 작품으로 기록된다.

그들은 날 수 없다. 
우리는 작게 보인다. 
우리는 높이 오른다. 

그 밤의 아카펠라 가사는 셀린 시아마 감독이 “우리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더욱 작게 보인다”라는 니체의 문장을 압축해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엘로이즈의 뒷모습이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게 만든다. 엘로이즈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높이 떠 있는 달을 부러운 듯이 담고 있지 않을까.

화가, 엘렌 델마르

© 엘렌 델마르 홈페이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모든 그림은 화가 엘렌 델마르(HÉLÈNE DELMAIRE)의 유화 작품이다. 엘렌 델마르는 1987년생으로 밀라노에서 수학한 고전 기법의 유화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현대적인 작품활동을 해온 아티스트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직접 엘렌 델마르를 발견해 이메일을 통해 함께하기를 제안했다고 한다.

엘렌 델마르는 ‘여성적’이라 여겨지는 꽃과 파스텔 톤의 색감을 의미 있고 강력한 것으로 표현한다. 또한 델마르의 작품은 여성의 눈과 얼굴을 덧칠하거나 지우는 것이 특징인데, 델마르는 이에 대해 “흔히 영혼의 창이라 불리는 눈과 얼굴은 지워지거나 가려져 다른 사람은 절대 닿을 수 없는 내면으로 향한다”고 설명한다. 마리안느가 첫 번째 초상화에 엘로이즈가 담겨있지 않은 걸 깨닫고, 그려진 얼굴을 지워버리는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이렇듯 셀린 시아마 감독은 단지 그림뿐 아니라 화가 엘렌 델마르의 작품 세계를 영화 속으로 자연스럽게 데리고 들어온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을 영화에 담을 때 편집 기술을 쓰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엘렌 델마르는 전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본, 캔버스 위를 누비는 손이 모두 엘렌 델마르의 손이라는 의미다. 관객들이 초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몰입해서 따라갈 수 있었던 건, 이 영화에서 얼마나 많은 초상화를 그렸냐는 질문에 “Oh my god so many”라고 답하는 엘렌 델마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드레스와 의상 소품

© <더 스크린>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2019년 프랑스에서 열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전시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한국에서 최초로 전시된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드레스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리안느의 평상복인 붉은 드레스와 갈색 코트, 마리안느의 코르셋과 바람을 막아주는 얼굴 가림천, 엘로이즈가 초상화를 위해 입는 초록색 드레스를 만날 수 있다.

이중 엘로이즈의 초록 드레스는 의미가 남다르다. ‘엘로이즈의’ 드레스로 소개되지만 사실 그녀만의 드레스는 아니다. 몰래 초상화를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주인 없는 드레스를 직접 입고 상상 속 엘로이즈의 포즈를 취해 본다. 이때 거울 속 얼굴 없는 마리안느의 초록 드레스는 ‘정체성과 존재감을 훼손당한 여성’을 의미한다. 그렇게 초록 드레스는 마리안느와 소피를 거쳐 비로소 엘로이즈가 입게 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도로테 기로 의상 감독과 함께 영화 속 의복을 모두 직접 제작했는데, “18세기 여성 의복을 충실히 재현하는 동시에 주머니 등을 활용해 현대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신경을 썼다”고 전했다. 이 드레스를 전시한 그린나래미디어 관계자에 따르면, 마리안느 드레스의 허리가 마네킹(55사이즈)보다 작아 옷을 전시하는 데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코르셋을 착용해야 했던 18세기 여성들의 갑갑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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