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 오기환 | 극본 오기환 | 출연 유이, 최시원
가상 공간에서 원하는 대로 외모를 바꿔 이상형을 만날 수 있는 데이트 앱 ‘증강 콩깍지’가 출시됩니다. 어느덧 한국에는 가상 연애 커플의 수가 현실 연애 커플의 수를 훌쩍 넘어서죠. 증콩 안에서 레오나르도와 지젤로 만난 서민준(최시원)과 한지원(유이)도 서로에게 푹 빠져 있는 ‘증콩’ 커플입니다. 100일을 기념해 한껏 분위기를 잡고 첫 키스를 하려는 그때, 증콩 시스템이 다운됩니다. 복구는 계속 늦어지고, 민준과 지원은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둘 중 누구도 ‘이제 현실에서 만나자!’는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아니, 못 하죠.
사람을 볼 땐 외모가 아닌 내면을 봐야 한다지만, 외모는 딱 눈에 보이지만 마음은 볼 수가 없잖아요. 언제나 그게 연애의 딜레마죠. <증각 콩깍지>는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굉장히 보편적인 메시지를 한번 비틀어서 보여줍니다. 현실의 서민준과 한지원은 멋진 외모를 가졌지만, 증콩 안에서는 현실과 달리 조금 못생긴 얼굴로 만나서 사랑에 빠집니다.
두 사람 모두 인공지능 성형 수술을 받았지만, 프로그램 오류로 전국에 똑같은 얼굴이 만 명이 넘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죠. 여기저기에 예쁘고 잘생긴 내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넘치는 상황. 문제는 또 있습니다. 민중과 지원은 현실에서 호감을 표시하는 이성을 믿지 않습니다. 다들 얼굴만 보고 접근한다는 의심이 드는 거죠. 대신 증콩 안에서 두 사람은 ‘과거의 개성 있는 내 얼굴’로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현실의 나보다 가상 현실의 내가 더 ‘나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 이게 <증강 콩깍지>의 핵심입니다.

멀리 미래까지 갈 것도 없이 지금도 사람들은 ‘현실의 나’와 ‘가상 세계의 나’라는 다른 정체성을 관리하며 삽니다. SNS 안의 유쾌하고, 멋지고, 즐겁고, 행복한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가 커질수록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21세기의 정신적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죠. <증강 콩깍지>의 서민준과 한지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연인을 만나기 위해선, 현실의 나와 가상의 나 사이 어딘가에 있을 ‘진짜 나’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증강 콩깍지>는 연애가 남을 사랑하는 과정이자, 나를 사랑하는 노력임을 잊지 않습니다.
다만 <SF8> 시리즈 중에서 유일한 SF 로맨틱 코미디답게 <증강 콩깍지>는 편안하게 웃을 수 있는 길로 갑니다. 소설 원작의 냉소적인 이슈를 솎아내고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맞는 뼈대만 가져왔습니다. 원작과 설정도 분위기도 전혀 다르죠. <선물>(2001), <작업의 정석>(2005)과 중국에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멜로 <이별 계약>(2013)을 만든 오기환 감독이 ‘로맨스’의 전공을 살려 SF 장르에 도전했습니다. 증콩 앱 다운에 화가 난 회원들이 ‘AR(증강현실) 집회’를 벌이는 장면처럼 SF 설정을 코믹하게 차용한 아이디어도 눈에 띕니다. 코미디와 로맨스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배우 최시원과 유이가 각각 가상 연애와 현실 연애 사이에서 고민하는 서민준과 한지원의 공감대를 높여줍니다.

원작 소설 <증강 콩깍지> 지은이 황모과 | 출판사 안전가옥
한국 SF 소설계의 기대주 황모과 작가가 참여한 ‘안전가옥 앤솔로지’ 단편 소설집 <대스타>에 수록된 소설입니다. 소설 <증강 콩깍지>는 증강 현실 렌즈 ‘콩깍지’를 착용하면,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상대를 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미래가 배경입니다. 렌즈 필터를 유명 연예인으로 설정하면, 내 연인이 유명 연애인이 되는 셈입니다. 주인공 윤성은 이 콩깍지 기술을 “시각적 비아그라”라고 표현하죠. 하지만 렌즈에 오류가 생기면서 윤성의 세계는 걷잡을 수 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증강 콩깍지>는 영화보다 주인공의 속내를 훨씬 적나라하고 냉소적으로 들려주면서 판타지 속에 머물고 싶어 하는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소설을 읽고 나면, 우리에게도 ‘필터링’ 되어 있는 몇 겹의 콩깍지들이 무겁게 느껴지죠.
editor 박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