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종료하시겠습니까 <하얀 까마귀>

시네마틱드라마 SF8 하얀 까마귀 White Crow, 2020

This post is last updated 10 days ago.

연출 장철수 | 극본 강선주 | 출연 안희연, 신소율

80만 명 구독자를 거느린 게임 BJ 주노(안희연)는 과거 조작 논란에 휩싸여 한순간에 인기가 급추락합니다. 마침 재기를 노리는 주노에게 새로운 VR 게임 런칭 기념 생방송 제안이 들어오죠. 게이머와 접속해 그의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하는 독특한 방식이지만 기회를 잡고 싶은 주노는 선뜻 참여합니다. 드디어 생방송 날, 주노가 게임에 접속한 사이 시스템이 고장 나고, 주노는 게임 속  트라우마의 무한 루프에 갇히게 됩니다. 게임의 안내자(신소율)가 주노를 도우려 하지만 주노의 트라우마는 너무 강렬합니다.  

시작부터 목이 꺾인 채 화면 앞으로 달려드는 어떤 존재가 우리를 반깁니다. 장철수 감독의 <하얀 까마귀>는 <SF8> 시리즈 중에서 유일한 SF 호러 장르예요. 만약 공포 게임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하얀 까마귀>가 친숙하고 반가울 겁니다. 그러나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VR) 귀신이 튀어나오는 자극적인 깜짝 쇼를 준비한 작품은 아닙니다. 진짜 공포는 늘 잔잔한 수면 아래 있죠.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엔터테인먼트 산업계에서 가장 빨리 첨단 기술이 도입되고, 가장 많은 돈이 몰리는 건 단연 게임입니다. 가상 현실 게임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 사람들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진짜 같은 게임을 원합니다. 한 게임회사는 인간의 뇌와 연결해 그의 무의식 속 트라우마를 끄집어내는 게임을 출시합니다. 그야말로 ‘개인 맞춤형’ 공포 게임이죠.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그 상처를 극복하면 ‘스테이지 클리어’.

잘 나가는 게임 BJ였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사건이 소환되면서 극심한 악플과 비난에 시달리는 주노는 트라우마 게임 생방송 중계로 재기를 노리죠. 방송을 보는 모든 사람이 주노의 트라우마를 ‘감상’하게 됩니다. 주노는 정신적으로 완벽히 벌거벗겨지겠지만,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구독자가 줄어드는 게 더 두려우니까요. 

<하얀 까마귀>2020

오프닝부터 한 차례 더 자극적인 관음증을 오락거리로 즐기는 게임, 인터넷 방송 등의 폐부를 쿡 찌르고 시작하는 영화는 본론으로 들어가면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하얀 까마귀>의 부제를 붙인다면 ‘22세기 여고괴담’이 어울립니다. 주노의 트라우마는 고등학교 시절, ‘쌍둥이’처럼 함께 붙어 다녔던 친구와 기억입니다. 가장 예민한 시기에 집단 따돌림, 헛소문, 언어폭력, 위계질서를 겪어야 하는 고등학교 시절은 ‘가상현실 트라우마 게임’의 완벽한 배경이죠. 게임 베테랑 주노의 ‘스테이지 클리어’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하얀 까마귀>는 고개를 돌리면 코앞에서 마주하는 VR 공포 게임의 경험을 굉장히 잘 표현합니다. 제목처럼 ‘흰 까마귀를 형상화한 것 같은 VR 게임기 디자인, 흑백의 강한 이미지 대비를 보여주는 안희연, 신소율 배우의 캐릭터, 친근하면서도 곳곳이 섬뜩한 고등학교 등 프로덕션 디자인에 굉장히 공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게임 속 강렬한 감정과 극적인 전개를 실감 나게 전해야 할 배우들의 연기가 극도로 격앙되어 있거나 뻣뻣한 점은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잊히지 않는 강렬한 장면들을 남기는 데 성공하죠. 동시에 잊고 있었던 고등학교 시절의 어떤 날들로 돌아가게 해줍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자신만의 ‘하얀 까마귀’를 만나게 될 겁니다.   

<하얀 까마귀> 지은이 박지안 | 출판사 허블

원작 소설 <코로니스를 구해줘> 지은이 박지혜 | 출판사 허블

<코로니스를 구해줘>는 1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 작품집 수록작입니다. 박지혜 작가는 당시 평범한 사람들을 ‘일약 유튜브 스타’로 만들어주던 ‘겜방, 먹방’ 등 1인 미디어 방송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세상에 공개하는 여성 게임 BJ의 선택을 그려냅니다. 이 작품으로 그는 2016년 한국 유일의 SF 신인문학상인 ‘한국과학문학상’이 생긴 첫해에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십 대 소녀들의 학창 시절, 우정과 시기, 질투와 거짓말, 왕따와 침묵의 폭력 등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동시에 VR 호러 게임의 쾌감을 놓치지 않은 수작입니다. ‘SF 호러’의 장르적 재미와 내밀한 성장통을 함께 그린 매력적인 단편입니다. 

editor 박혜진

재미에도 안목이 있다. <더 스크린>

환영합니다. 2019년 1월 문을 연 영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더 스크린>은 가치 있는 문화 생활을 원하는 여러에게 더 좋은 경험을 약속하는 ‘컨시어지 미디어’입니다.

여러분이 귀한 시간을 들여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할 ‘멋진 문화 콘텐츠’와 1984년 창간해 26년 간 천만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전문 월간지 <스크린>의 독점 아카이빙 콘텐츠를 만나보세요.

More Stories
<선희와 슬기>를 사랑하기 위하여